'제2 테슬라' 스타트업, 자금난에 존폐기로

2023-12-20 11:21:41 게재

비용상승에 제조난관으로 비틀거려 … WSJ "내년 말까지 현금 소진될 기업만 18곳 달해"

불과 수년 전만 해도 미국의 전기자동차 스타트업들은 승승장구했다. 저마다 '제2의 테슬라'를 약속하며 투자자들에게 장밋빛 희망을 심어주기에 분주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기업들이 존폐의 갈림길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18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분석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말 기준 '니콜라'와 '피스커' 등 최근 수년간 상장한 전기차 또는 배터리 스타트업들 중 최소 18곳이 짧게는 열흘, 길게는 2024년 말까지 자금경색에 처할 위험인 것으로 나타났다.

WSJ는 "이들 기업은 투자자들에게 '자동차업계를 변화시키고 기후변화 대처의 첨병이 되겠다'고 약속한 곳들이다. 이제 비용 상승과 제조상 문제로 비틀거리면서 그같은 약속은 멀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미 전기트럭 제조사 '로드스타운 모터스', 전기버스·배터리팩 제조사 '프로테라', 전기밴 제조사 '일렉트릭 라스트 마일 솔루션스' 등 3개 기업은 파산을 신청했다. 배터리 제조업체인 '로미오 파워'와 전기차 충전기업 '볼타'는 상장 당시 가치보다 크게 떨어진 가격에 매각됐다. 남은 기업 중 일부는 비용절감에 사활을 걸고 추가자본을 조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WSJ가 평가한 기업들의 평균 주가는 상당 당시보다 80% 넘게 하락했다. 최고점 대비로는 훨씬 더 깊이 하락했다. 불과 수년 사이에 수백억달러의 시장가치가 사라졌다. 헤지펀드 '아트레이데스 매니지먼트' 최고투자책임자인 개빈 베이커는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미친 듯한 거품이었다"고 말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부분의 스타트업들이 기업인수목적회사(SPAC)를 통해 상장했다. 전통적인 기업공개(IPO)에 대한 대안으로 인식된 SPAC 기반 상장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급증했다. WSJ에 따르면 SPAC 상장은 IPO와 달리 '스타트업이 얼마나 빨리 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예측과정이 검증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WSJ는 "전기차 스타트업들의 급격한 운명 변화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계속 변화하는 이 업계에 대한 투자가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며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많은 스타트업과 투자자들이 예상했던 것만큼 폭발적으로 증가하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테슬라를 비롯한 다른 국가들의 시장 선도 전기차 기업들도 고객 확보를 위해 가격을 인하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산을 시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발주자들은 더욱 압박을 받고 있다. 최고의 전기차 기업으로 꼽히는 테슬라조차 5년 전엔 자금경색으로 파산할 위기에 처했다.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는 '제조의 저주(manufacturing hell)'라며 당시의 생산지연 상황을 개탄한 바 있다.

WSJ가 전기차와 배터리 스타트업의 성과를 분석하기 위해 2020~2022년 상장한 43개 기업을 확인한 바에 따르면, 5개 기업이 파산 신청을 했거나 인수됐다. WSJ는 나머지 38개 기업을 대상으로 금융정보기업 '팩트셋'이 수집한 각 기업의 가장 최근 재무보고서를 바탕으로 영업현금흐름과 현금·단기투자금을 비교했다.

분석 결과 18개 기업이 비용을 절감하거나 신규자본을 조달하지 않으면 내년 말 현금이 고갈될 것으로 예상됐다. 이 가운데 7개 기업은 보유 현금이 불과 몇주밖에 남지 않았다. 몇몇 기업은 새로운 자금을 조달했거나 계획 중이며, 매출 증대를 위해 노력하면서 비용을 절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니콜라는 최근 재무보고서 발표 이후 새로운 자본을 조달했다. 피스커 대변인은 신차 인도를 가속화하고 물류인프라를 개선하기 때문에 회사의 3분기 비용이 반드시 미래 분기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16개 기업은 매출증대를 위한 노력으로 주가에 압박을 받고 있었지만 2024년 이후에도 계속 운영할 수 있는 충분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약 8만달러에 달하는 픽업트럭을 생산하며 스포츠카 수준의 핸들링을 자랑하는 리비안 오토모티브, 비슷한 가격대의 고급 세단을 만드는 루시드가 대표적이다. 4개 기업은 영업을 통해 현금을 창출하고 있었다.

자금압박을 받고 있는 기업 중에는 패러데이 퓨처 인텔리전트 일렉트릭이 있다. 이 기업은 2021년 상장 당시 기록적인 매출 성장을 약속했다. 패러데이는 자율주행 기능, 안면인식 기술 등을 갖춘 미래형 전기 자동차를 개발하기 위해 약 10억달러를 투자 받았다. 신차 가격이 약 30만9000달러에 달하는 패러데이 전기차는 공급망 차질로 생산에 이르기까지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패러데이는 9월에 끝난 3분기에 하루 평균 약 87만5000달러의 현금을 소진했다. 이로 인해 3분기 말 기준 현금 및 단기투자액은 약 860만달러로 감소했다. 패러데이 대변인은 "회사가 자본확충에 합의했으며 생산량을 늘리고 비용을 절감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 이후에 사용할 현금을 확보한 기업들도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 폐배터리를 전기차 재료로 재활용하는 '리사이클 홀딩스'는 최근 비용상승을 이유로 뉴욕주 로체스터에 짓고 있던 첫번째 대형 생산시설의 건설을 중단했다. 이 회사의 주가는 상장 당시 주당 10달러에서 현재 약 65센트에서 거래되고 있다.

내년 말까지 자금경색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큰 또 다른 기업은 전기차 스타트업 '카누'다. 카누는 2020년 "수년 내 10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창출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같은 약속을 한 최고경영자가 사임한 뒤 2021년 취임한 CEO 토니 아퀼라는 "그 목표는 확고한 시장 수요, 자본에 대한 완전하고 무제한적인 접근을 기반으로 설정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카누의 현 주가는 상장 당시 가치보다 95% 이상 하락한 약 25센트다. 아퀼라 CEO는 "비용 절감을 위해 회사의 전략을 변경했다. 현금을 조달하기로 합의했다"며 "패밀리오피스를 포함한 투자자들로부터 더 많은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전기차 스타트업들의 주가 하락은 글로벌 자산운용사 블랙록이나 피델리티, 거대기업 코흐인더스트리 등 대형 투자자들에게도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이 기업들은 전기차 스타트업에 수억달러를 투자했다. 코흐 인더스트리 대변인은 "전기차 스타트업 투자에 대해 장기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개인투자자들 역시 전기차 스타트업들이 상장할 때 내걸었던 큰 약속에 휩쓸렸다. 청정에너지 기업을 분석하는 투자은행 '차단'의 상무이사 브라이언 돕슨은 "당시는 모두가 제2의 테슬라를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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