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141년 비사│ (16) 은자(隱者)에서 개방의 세계로

미국 시카고 박람회에 공식 참가하다

2023-12-22 11:24:19 게재
한종수 한국 헤리티지연구소 학술이사

세계 엑스포는 크게 등록엑스포(International Registered Exhibition, World's Fair)와 인정엑스포(International Recognized Exhibition)로 나뉜다. 얼마 전 부산이 유치하고자 했던 2030세계 엑스포(World EXPO 2030)는 등록엑스포로 그 규모 및 주제, 개최 기간 등 모든 면에서 인정엑스포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등록엑스포는 유엔에 등록된 행사로 월드엑스포(World's Fair)라는 이름에 걸맞게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다. 전시 규모 제한이 없고 참가하는 나라가 자국 비용으로 전시관을 건립해 경제효과가 크고 볼거리도 풍부하다.

반면 1993년 '새로운 도약으로의 길'을 내걸었던 과학 주제의 대전엑스포와 2012년 '살아있는 바다, 숨쉬는 연안' 슬로건의 바다를 주제로 한 여수엑스포는 인정엑스포로 주제가 한정된 행사였다. 이번 엑스포유치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Riyadh)에 119대 29로 실패한 것은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한국인으로 사상 처음 국제박람회를 접한 것은 1883년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 일행이다. 보스턴 방문 당시 퍼시벌 로웰(Percival L. Lowell)의 안내로 보스턴 박람회를 참관한 전권대신 민영익은 큰 문화적 충격을 받고 조선 귀국 후 서울에서 국제박람회를 개최하고자 했으나 1884년에 발발한 갑신정변과 국내외 상황으로 좌절된 바 있다.

1893년 시카고 박람회 직전 이채연 서리공사(1893.1.30)

시카고 박람회 조선행사 총괄한 이채연

1890년 9월부터 1893년 6월까지 서기관이었던 이채연은 서리 공사 자리를 맡는다. 초대 공사 박정양, 2대 이하영, 3대 이완용에 이은 4대째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먼저 비좁은 피서옥(皮瑞屋, Fisher's house)에서 인근 아이오와 서클(Iowa circle)에 고종의 왕실 자금 2만5000달러를 들여 공관을 매입한다. 미국 내 첫 조선의 국유재산이다.

다른 활동으로는 1893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 개관한 국제박람회에 처음으로 참가한다. 조선전시관은 단지 7~8칸의 기와집이었으나 그는 전시관 실무 총책임을 맡아 준비한다. 그로부터 100년 후 1993년 대전엑스포의 주최국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1893년 시카고 박람회는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콜롬비아 세계박람회다. 조선이 시카고 박람회에 참가한 데는 당시 주조선미국공사관 서기관인 알렌(Horace N. Allen)의 역할이 컸다. 알렌은 초대 박정양 공사를 모시고 1888년에 외교 참찬관으로 주미조선공사관에서도 활동한 바 있는 인물로서 워싱턴 DC의 정치·경제계 인사에게 조선을 알리고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톡톡히 한다.

알렌의 1893년 시카고 박람회 출입증

조선의 시카고 박람회 참가는 시카고 국제박람회 이사인 고워드(Gustavus Goward)가 1891년 5월 조선을 방문해 고종에게 시카고 박람회 참가를 공식 요청하며 시작된다. 고워드의 조선 방문을 계기로 고종은 시카고 박람회 참가를 결정하며, 주미조선공사관 서리 공사를 지낸 바 있는 이완용을 출품사무대원(出品事務大員)으로 임명한다. 여기서 출품사무대원은 말 그대로 세계무대에 조선의 무엇을 알리고 소개할지 정하는 역할이다.

고워드가 방문한 지 1년 5개월 후 시카고 박람회 홍보원이자 플랭크 래슬리 주간지(Frank Leslie's Weekly) 기자 게르빌(A. B. de Guerville)이 조선을 방문해 박람회 조감도 및 계획 등을 고종에게 설명하며 참가는 구체화된다. 실무 준비는 1891년 5월부터 2년여 기간 동안 조선에 주재하는 미국공사관 참찬관 알렌의 주도하에 박람회에 전시할 물품뿐만 아니라 문화행사 등을 마련하는데, 시카고 박람회 펀(Walice Fearn) 위원은 알렌을 시카고 박람회 명예사무대원(Honorary Commissioner of World's Fair)에 임명할 정도로 그의 활발한 활동은 조선의 박람회 참가에 결정적이었다.

한편 조선 내부 사정에서도 시카고 박람회 참가 동기를 찾아볼 수 있다. 청국의 북양대신 리홍장(李鴻章)의 속방론 주장에 시달려 온 조선으로서는 미국의 참가 요청과 더불어 청국으로부터 독립을 꾀하고자 했다. 시카고 박람회에 청국이 공식적으로 참가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들었던 터였으니 조선으로선 자주독립을 펼칠 기회였다.

시카고박람회 출품사무대원 정경원

시카고 박람회 출품사무대원으로 이완용을 임명해 줄곧 준비를 해왔으나, 시카고로 출발을 앞두고 끝까지 고사한 이완용 대신 1893년 3월 8일,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정경원(鄭敬源)으로 교체해 임명한다.

출품대원 정경원은 3월 28일 수원 박용규(朴鎔圭), 주사 최문현(崔文鉉)과 통역 안기선(安琪善), 악공(樂工) 10명, 그리고 주미조선공사관에 부임하는 참무관 이승수(李承壽), 서기관 장봉환(張鳳煥) 이현직(李顯稙)까지 총 17명이 이세환(伊勢丸) 배를 타고 요코하마(橫濱)를 거쳐 4월 2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다시 이들은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4월 28일 시카고 유니온역(Chicago Union Station)에 내려 먼저 도착해 있던 알렌, 서리공사 이채연과 함께 팔머 하우스(Palmer House)에 머문다.

박람회장에서 조선 전통음악 연주

1893년 5월 1일 시카고 박람회 개막식에 참석한 조선인은 총 19명으로 정경원, 최문현, 안기선, 박용규, 서병규(徐丙奎), 악공 10명, 공사관에 부임 중인 이승수, 장봉환, 이현직, 그리고 명예사무대원인 알렌 등이다. 알렌은 박람회기간 동안 궁중 아악을 연주할 계획 아래 장악원(掌樂院) 악공 10명을 대동해 출발시켰다. 장고 악사 이창업(李昌業)을 악단장으로 강재천(姜在天) 이경룡(李景龍) 이지행(李枝行) 최을룡(崔乙龍) 이수동(李壽同) 안백룡(安伯龍) 신흥석(申興錫) 정기룡(鄭奇龍) 이재룡(李在龍) 등 10명이 미국 땅에서 조선의 전통음악을 연주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알렌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부터 전해지는 궁중악인 황풍악(皇風樂) 연주를 관람한 미국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조선의 전통음악은 동양 전통음악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호평을 했다고 적고 있다.

한편, 참무관 이승수, 서기관 장봉환·이현직은 1893년 5월 5일 워싱턴DC로 이동해 공사관 활동을 시작한다.


참고자료
1. 김원모, 《한미 외교관계 100년사》, 철학과현실사(2002)
2. 김원모, 《상투쟁이 견미사절 한글국서 제정 下》, 단국대학교출판부(2019)
3. 이민식, 《근대사의 한 장면 콜럼비아 세계박람회와 한국》(2006)
4. 이민식, 〈석거 이채연(1861~1900)〉, 《근대한미관계사》(2017)
5. 알렌의 후손 시카고박람회 출입증 제공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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