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장 리포트

흑인여성 하버드 총장 사퇴와 진영전쟁 격화

2024-01-09 11:54:07 게재
남수경 뉴욕주 변호사

미국의 대표적인 명문대 하버드의 클로딘 게이 총장이 1월 2일 전격 사퇴했다. 흑인 여성인 게이 전 총장은 400년 가까운 하버드대 역사상 첫 흑인 총장이라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지만, 취임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사임하게 되면서 하버드 역대 총장들 중 가장 짧은 기간 동안 재임한 총장이라는 불명예도 안게 됐다.

게이 총장의 사임은 대학 자체의 결정이라기보다 외부 압력의 결과다. 지난 12월 5일 열린 연방 하원 교육위원회 주최 청문회에서 학생들의 반(反)유대주의 혐오 발언을 징계해야 하는지 따져 묻는 공화당 엘리스 스테파닉 의원의 질문에 "맥락에 따라 다르다" "하버드가 추구하는 가치와 위배되지만 대학 내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고 답하면서 시작됐다. 게이 총장이 학내 반유대주의 움직임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지 않다는 비판이 뒤따랐고, 일부 성난 후원자들은 거액의 기부금을 철회하겠다는 압력을 넣었다.

당시 게이 총장과 마찬가지로 반유대주의에 대한 질문에 모호하게 대답했다는 비난을 받은 펜실베니아대 엘리자베스 매길 총장은 청문회 직후 나흘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큰 손 기부자들의 압력과 보수진영의 비판 속에서도 하버드대 이사회가 만장일치로 그의 재신임을 결정하면서 게이 총장은 위기를 벗어나 총장직을 유지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청문회 이후 보수진영이 연일 제기한 논문 표절의혹에 결국 사퇴를 선택하고 말았다.

보수주의자들의 타깃 된 DEI 정책

사퇴 발표 다음 날 게이 전 총장은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자신에 대해 가해진 반유대주의와 표절의혹을 부인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겨냥한 (퇴진) 캠페인이 "한 대학과 총장 한 명에 대한 것을 넘어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임을 발표하면서 학생과 교직원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는 "인종적 적대감으로 인한 인신공격과 위협을 당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라며 지난 몇주 동안 겪은 일을 토로하기도 했다. 실제 그는 의회 청문회 이후 이메일과 전화로 인종혐오적 언사, 심지어 살해위협에 시달리면서 경찰이 총장 공관을 24시간 경비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게이 전 총장의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 그의 사퇴 배경에는 단순한 표절 문제 또는 대학가의 반유대주의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않은 것 이상이 있다고 본다. 표절의혹을 집요하게 제기해 게이 총장 사퇴 압력을 넣는 데 앞장 섰던 보수우파 활동가 크리스 루포는 게이 총장의 사임 소식을 듣고 "그녀의 사임은 우리의 승리이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미국에서 DEI의 종말이 시작되었다"면서 "우리의 위대한 나라에서 인종에 구애받지 않는 평등이 회복될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DEI는 다양성·형평성·포용성(Diversity·Equity·Inclusion)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오랫 동안 차별받아 온 소수인종 여성 성소수자 등에게 교육이나 취업 등에서 적극적으로 기회를 제공해 전통적으로 권력과 특권을 독식해 온 그룹과의 간극을 줄이고 인종과 성별 다양성을 추구하려는 정책이다.

특히 2020년 백인 경찰에 의해 살해된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 이후 고질적인 인종차별과 이의 극복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학계와 정부 기관뿐 아니라 많은 기업들도 자발적으로 소수인종 채용을 늘리고, 소수자에 대한 포용성을 높일 뿐 아니라 기업 임원 구성에서도 인종 및 성별 다양성을 늘려가겠다고 약속했다. 일부 기업은 자신들의 기업 이미지 홍보에 DEI를 이용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그것조차 인종차별 철폐에 대한 사회적 의식과 분위기가 고조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반유대주의나 표절 문제 아냐

하지만 이런 진보적인 방향으로의 움직임뿐 아니라 이에 대한 반발도 커지고 있다. DEI가 백인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보수진영의 공격이 거세지고 있다. 특히 지난해 여름 연방대법원이 대학입학 사정에서 인종을 한 요소로 고려하는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을 위헌이라고 판결하면서 이들의 자신감은 한층 고조되었다. 그 결과 DEI에 대한 공격에 더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대법원 판결에서 취업이나 직장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음에도 보수진영은 교육계뿐 아니라 기업이나 정부의 DEI 프로그램에도 화살을 겨눴다.

예를 들면 대법원 판결 직후 공화당이 집권하고 있는 13개 주 법무장관들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대기업들에 공동편지를 보내 대법원 판결에 맞춰 DEI 정책을 재고할 것을 요구했다. 직원 채용이나 승진에 특정 인종을 우대하는 정책을 폐기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법적 결과를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한 것이다. 실제로 현재 메타 (전 페이스북), 제약회사 화이자 등 수십곳 대기업들이 DEI 정책 때문에 보수진영에게 소송을 당하고 있다. 조지아주 애틀란타에 있는 한 벤처캐피탈 회사의 경우 유색인종 여성이 운영하는 소규모 사업체를 돕기 위한 펀딩을 하고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이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소송이 제기되면서 현재 중단된 상태다.

DEI를 반대하는 보수진영에 따르면 게이 총장 또한 본인의 능력이 아니라 흑인 여성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하버드대 총장 자리까지 올라갔다는 것이다. 즉 DEI 정책이 없었다면 자격미달인 그가 총장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게이 전 총장이 하버드 문리대 학장 재직 당시 대학의 DEI 정책을 주도한 것도 이들에게는 그녀가 계속 총장 자리에 앉아 있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됐을 수 있다.

기업가이자 공화당 대선 경선주자인 비벡 라마스와미와 공화당 J.D. 밴스 상원의원은 소셜미디어 X(전 트위터)에서 게이 총장이 자질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인종 카드로 총장 자리에 오른 것이라면서 인종과 성별이 아닌 "능력을 보고 리더를 선택하라"고 충고했다.

반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찰스 블로우는 1월 3일자 칼럼에서 우파가 게이 총장을 겨냥한 진짜 이유는 표절이나 반유대주의 때문이 아니라 하버드대 사상 첫 흑인 총장이라는 상징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한 것이고, 동시에 그동안 쌓아올린 진보의 성과를 되돌리고 진보에 앞장서는 주자들을 욕보이기 위해 설계된 프로젝트라고 주장했다. 저명한 흑인 민권운동가 알 샤프턴 목사도 성명서에서 게이 총장의 사임은 이른바 '유리천장'에 금을 낸 흑인 여성과 DEI에 대한 공격이라고 성토했다.

보수-진보 진영전쟁은 이제 막 시작

이렇듯 현재 미국에서 DEI를 두고 벌어지고 있는 보수와 진보 세력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게이 총장의 사임을 불러온 주요 이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게이 총장의 사임은 대학뿐 아니라 정부 및 기업 등 미국 사회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DEI 정책에 대한 보수진영의 반대 캠페인에 일단 큰 승리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양쪽 진영 다 이 싸움이 끝난 게 아니라 이제 막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하버드 내부에서도 학교가 외부의 정치적 압력에 굴복하면서 대학의 자율성이 침해되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버드대 저명한 흑인교수이자 법학자인 랜달 케네디는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인 거짓 정보와 위협적인 캠페인으로부터 (하버드 같은) 훌륭한 대학이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했다는 것이 슬프다" 고 토로했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칼릴 지브란 무하마드 교수는 "끔찍한 순간"이라며 "의회의 공화당 지도부가 대학의 자유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고 주장했다. 새해 벽두 미국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과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고스란히 드러낸 게이 총장 사임 소식의 충격이 한순간에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남수경 뉴욕주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