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보급? 제조업 방어? 서구 딜레마

2024-01-10 11:22:49 게재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중국의 전기차 우위, 각국에 복잡한 도전과제 던져"

한세기 가까운 동안 일본 도요타는 복잡하고 정교한 내연기관 자동차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을 지속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컸다. 하지만 도요타 전기차부문 책임자인 가토 타케로는 2018년 중국을 방문했을 때 충격적인 사실을 목도했다고 한다. 가토는 지난해 11월 사내신문 '도요타 타임스'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중국산 부품의 경쟁력을 실감했다"며 "일본에서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장비와 최첨단 제조기술을 보며 위기감에 휩싸였다"고 회상했다.

가토의 걱정은 옳았다. 중국은 지난해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대 자동차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상하이에 본사를 둔 컨설팅기업 '오토모빌리티'에 따르면 중국 자동차 수출액은 2020년 이후 거의 5배 증가해 지난해 5억달러에 육박했다. 2023년 4분기엔 선전에 본사를 둔 비야디(BYD)가 사상 처음으로 테슬라를 제치고 세계 최대 전기차 판매기업에 등극했다.

BYD 매출은 대부분 중국 내수시장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이 기업은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는 중국 전기차업계의 대표주자다. 상장기업인 BYD와 국영기업인 체리 등 중국의 여러 전기차업체들은 헝가리와 멕시코 등 새로운 지역사업장을 통해 저렴한 전기차를 서구시장에 수출할 계획이다. 자동차 컨설팅기업 '던인사이트' 최고경영자 마이클 던은 "단언컨대 가격면에서 BYD를 따라잡을 수 있는 기업은 없다"며 "미국과 유럽 한국 일본 기업들은 충격에 빠졌다"고 말했다.


자동차 강국들, 중국 전기차 굴기에 충격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7일자 보도에 따르면 중국 기업들이 만든 수백만대 저렴한 전기차가 유럽을 강타할 것이라는 전망에 유럽 정치권은 딜레마에 빠졌다. 값싼 중국산 자동차의 범람은 유럽 자동차 제조업체들에 재앙이 될 수 있다.

유럽연합(EU)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지난해 9월 연두교서에서 "중국이 막대한 국가보조금을 통해 전기차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EU는 중국 전기차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관세 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반면 미국정부는 국내 자동차 제조업을 장려하기 위해 막대한 보조금으로 대응하고 있다.

FT는 "유럽이 2035년까지 내연기관차를 완전히 금지하려는 상황에서 저가 전기차 수입을 제한하면 전기차시장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크라이슬러 동북아시아 책임자를 지낸 오토모빌리티 설립자 빌 루소는 "중국 자동차 수출의 3/4이 가솔린이나 디젤 엔진을 탑재하고 있다"며 "하지만 전세계 자동차 제조업체를 긴장시키는 건 저렴한 중국산 전기차"라고 말했다.

미국제조업동맹(AAM) 등 로비단체들은 지난해 "홍수처럼 쏟아지는 중국 수입품으로 과거 여러 산업이 황폐화됐다. 특히 태양광·철강 제조사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며 "전기차 배터리에서도 그같은 재앙을 겪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중국 전기차가 관세의 벽을 뛰어넘어 미국·유럽 전기차와 가격경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자동차업계가 가장 큰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는 BYD의 비용우위는 전기차의 가장 비싼 단일부품인 리튬기반배터리 생산에 대한 전문성에서 비롯된다. 1990년대와 2000년대 휴대폰배터리 제조업체로 출발한 BYD는 이 분야의 세계적인 리더다.

미국 투자자문사 번스타인에 따르면 BYD 배터리는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동시에 가장 높은 에너지 밀도를 자랑한다. 이는 곧 전기차 성능향상으로 이어진다. 테슬라와 도요타도 BYD 배터리 고객이다.

BYD 배터리는 서구 라이벌 기업들을 따돌리는 1등공신이다. BYD의 가장 저렴한 전기차 모델인 아토3은 유럽에서 3만8000유로에 판매된다. 테슬라의 모델3은 독일 프랑스 등 주요 시장에서 약 4만3000유로에 팔린다.

BYD는 50여개국에 전기차를 수출한다. 지난해 25만대에 육박하는 전기차를 수출했다. BYD 경영진은 투자자들에게 "향후 수년간 수출물량을 10배 이상 늘릴 수 있다"고 자신한다.

던인사이트 CEO 던은 "중국은 전세계 다른 국가들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전기차를 생산하고 구매한다"며 "중국 전기차 제조업체들은 전세계 전기차 수요의 75%를 공급할 수 있는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는 서구 자동차 제조사들의 밤잠을 설치게 만든다"고 말했다.

과잉생산 세계로 뿜어내는 중국

중국 생산능력은 자체 수요에 비해 과잉이다. 유럽에 속속 발판을 마련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때문에 1조5000억달러 규모의 미국 자동차시장에 발을 들여놓는 게 중요하다.

던 CEO는 "중국 전기차 업체들은 내수시장에 만족하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북미로 가야 하고 진출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 중 하나는 미국 남쪽에 기지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BYD를 비롯한 여러 중국 기업들은 미국 소비자뿐만 아니라 북미 지역의 다른 국가를 더 잘 공략할 수 있는 새로운 제조공장을 찾기 위해 멕시코시장을 살펴보고 있다. 중국 기업들은 한국과 일본 유럽의 경쟁업체들에 비해 미국 진출 측면에서 불리한 입장에 있다. 미국 바이든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안(IRA)은 주요 공급망에서 중국 기업들을 배제하기 위해 수십억달러의 전기차 보조금을 마련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무역장벽과 미국 내 반중정서를 고려하더라도 BYD 등 중국 기업들이 언젠가는 미국 자동차시장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시장에서의 경쟁력은 가격이다. GM과 포드, 크라이슬러(스텔란티스 소유) 등 이른바 '디트로이트 3인방(Detroit Three)'은 대개 저가 자동차시장을 외면하고 픽업트럭과 스포츠유틸리티차량에 집중하고 있다.

던인사이트에 따르면 올해 미국의 신차 평균가격은 약 4만8000달러다. 던 CEO는 "중국 전기차 제조사들이 2만달러짜리 신차를 내놓는다고 상상해보라. 25% 관세가 붙어도 2만5000~2만6000달러다. 그래도 중국 전기차들은 여전히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말했다.

서구 각국은 중국 전기차의 시장 진출에 경계심을 높이고 있다. 바이든정부는 멕시코에 집중된 중국 투자러시에 대해 비공개 경고했다. 미의회도 최근 멕시코정부에 보낸 서한에서 중국 기업들이 멕시코를 시장진출 '백도어'로 이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편 중국 전기차에 대한 EU 반덤핑·보조금 조사는 올해 11월 결론이 내려질 예정이다.

동시에 미국과 유럽 각국은 에너지·통신 등 핵심 인프라에 중국산 부품을 사용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보안위험에 대해서도 집중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같은 우려가 배터리 및 기타 청정기술뿐 아니라 전기차에 대해서도 적용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중국 자동차업계는 서구의 지나친 보호무역주의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외국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오랫동안 중국이라는 거대한 소비시장에서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고 주장하며 자국에 공정한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중국 기업들은 또 서구 소비자들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글로벌기업'으로 변모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상하이에 본사를 둔 전기차그룹 니오의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인 윌리엄 리는 지난해 말 FT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이외의 국가 출신 투자자들이 회사주식의 80%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기업은 2015년 설립 이후 줄곧 미국 실리콘밸리에 지역본부를 운영하고 있다. 윌리엄 리는 "우리는 창업 초기부터 글로벌 스타트업이 되기를 희망했다"며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기후변화 문제는 전세계가 함께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중국 베이징에 본사를 둔 컨설팅기업 '트리비움 차이나'의 코리 콤스 부소장은 "서구 각국의 정책입안자들은 청정기술 공급망에서 중국을 차단하려고 한다. 하지만 탄소중립 목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콤스 부소장은 "서구 국가들이 공급망을 다각화하려는 노력은 정당하지만, 충분한 완화전략 없이 자국의 기후변화 대처에 제한을 가하면서 스스로를 코너로 몰아넣을 위험이 있다"며 "우리는 성패를 가르는 순간에 빠르게 다가서고 있다. 많은 국가들이 전기차 확산과 제조업 방어라는 상충하는 목표 사이에서 철저한 고려를 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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