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특별기고

2024년 한국외교 최우선 과제는 '전쟁예방 외교'

2024-01-11 11:29:03 게재
조 현 서울대 객원교수, 전 유엔대사

새해를 미국에서 맞았다. 미국 경제는 예상보다 호황이고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도 여전하지만 무언가 편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미국은 결코 쇠퇴하는 글로벌파워가 아니라고 주장해왔던 칼럼니스트 자카리아도 연말 칼럼에서는 다소 비관적인 논조다. 그는 우크라이나전쟁을 포함한 국제정세가 미국에 쉽지 않게 전개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가장 큰 위험요소는 미국의 국내정치라고 단언했다. 양극화된 의회와 극단으로 치닫는 여론, 무엇보다 예측할 수 없는 올해 11월 대선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다. 대선은 이제 미국은 물론 세계를 크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위험요소로 대두했다. 2024년 벽두에 워싱턴에서 느끼는 미국의 상황부터 살펴본다.

미국은 2곳의 전쟁과 함께 새해를 맞았다. 당장 발등의 불은 가자지구 전쟁이다. 지난해 10월 하마스의 테러 공격 직후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확고한 지지 입장을 견지하면서 중동 전역으로 전쟁이 확산되는 것을 비교적 잘 막아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많은 민간인을 살상하면서 전쟁을 계속하자 국제여론이 악화됐고 미국도 함께 고립되는 상황이 됐다. 미국 내 여론도 젊은층을 중심으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동정과 반이스라엘 정서가 확산되고 있어 대선을 앞둔 바이든정부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전쟁 역시 진퇴양난이다. 나토를 아우르면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온 미국으로서는 공화당의 유보적 태도와 유럽 일각의 전쟁 피로감이라는 내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전선도 교착상태에 빠졌다. 러시아는 이미 우크라이나 영토의 1/5을 점령했고 서방의 제재 속에서도 경제적 여유를 되찾는 듯 보인다. 따라서 2024년에도 참혹한 전쟁이 계속되거나 러시아에 유리한 상황에서 종전협상이 시작될 가능성이 커졌다. 푸틴은 협상을 하더라도 11월 전에 바이든정부에게 승리로 간주될 결말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워싱턴 여론은 조심스럽지만 민주당

중국과 전략경쟁을 하면서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 미국에 가장 큰 도전요소다. 이 문제 또한 미국의 대선과 영향을 주고받을 것이다. 이번 주 대만 총통선거 결과는 당장 미중간의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미국과의 군사력 차이 때문에 가까운 미래에 군사적 행동을 감행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오히려 지난해 10월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에서 보인 것처럼 중국은 미국과 협력을 추진하면서 도광양회(韜光養晦)로 회귀하는 모습이다.

미국도 지난해 각료들이 베이징을 연달아 방문하면서 중국과 어느 정도 협력을 모색해 나갈 것이다. 나아가 북한-러시아의 밀착과 우크라이나 전황에 비추어 중국과 물밑협상을 추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의 중국경제 허물기와 첨단산업을 둘러싼 경쟁은 지속될 것이고 11월까지 대선 과정에서 중국 때리기는 언제든 재점화될 수 있다.

이처럼 미국 대선은 투표 몇달 전부터 국제정치 지형을 크게 요동치게 만들 것이다. 4월에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면 많은 공화당의원들은 국내정치는 물론 외교문제에 관해서도 그의 말을 따르며 바이든정부를 압박할 것이다. 미국의 지식인들은 트럼프가 당선되면 민주주의가 망가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과반 이하로 줄어드는 백인 인구, 감당하기 어려운 이민자 급증, 소득양극화 같은 정치사회적 변화 속에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아주겠다"는 트럼프의 호언은 35% 정도의 지지층에게 강하게 어필한다. 따라서 트럼프에 대한 이들의 지지는 쉽게 변치 않는다.

그러나 워싱턴에서 만난 사람들은 물가가 잡히면서 미국 경제가 계속 좋아지고 있고 낙태 문제가 스윙스테이트의 백인 여성을 결집시킬 것이며 빈번한 총기사고도 민주당에 유리하다는 점을 들면서 조심스러운 낙관론을 편다.

억제 강화하더라도 대화 포기해선 안돼

이런 미국 상황을 염두에 두고 2024년 한국외교의 과제를 살펴본다. 새해 벽두부터 시작된 북한의 도발에 비춰 올해 한국외교의 최우선 과제는 전쟁발발 가능성을 줄이는 전쟁예방 외교가 되어야 한다.

사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한미동맹 강화를 통한 대북억제력 향상에 매진해왔다. 지난해 핵확장억제에 관한 워싱턴선언에 이어 올해에는 핵작전연습도 실시된다고 한다. 여기에 선제타격과 대량응징보복의 공세적 교리도 강화되었다. 이만하면 충분한 억제다. 이제는 전쟁예방 외교가 필요하다.

지난주 만난 아인혼 전 국무부 비확산차관보는 소련의 페트로프 대령 같은 인물이 북한의 억압적 체제에서 나올 수 있을지 의구심을 나타냈다. 페트로프는 1983년 소련 당국이 강렬한 햇빛을 미국이 발사한 대륙간탄도미사일로 오인해 맞대응 미사일을 발사하려던 찰나에 이를 막은 인물이다. 이 일로 그는 핵전쟁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남자로 유명세를 탔다.

아인혼은 김정은이 자살과 같은 핵공격을 먼저 할 것 같지는 않지만 통신선마저 차단된 현 상황에서 우발적 충돌이 끔찍한 핵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오인이나 긴장고조를 막을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지난 정부가 북한과 대화를 하더라도 국방을 소홀히하지는 않았던 것처럼 책임 있는 정부라면 억제를 강화한다고 대화를 포기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억제와 외교가 병행되어야 한다.

경제외교는 국부를 창출하는 중요한 기능이지만 우리 정부는 경제안보의 프레임에 갇혀 미국의 산업정책을 상수로 받아들였다.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 직후에는 "미국은 대가를 줄 준비가 돼 있는데 정작 한국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 워싱턴에서 흘러나왔다.

다행히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대해 한국 기업들은 발 빠른 대응을 해왔다. 삼성과 애플 간의 경쟁과 협력에 관해 연구해 온 예일대 네일버프 교수도 한국의 기업들이 IRA의 인센티브를 활용하면서 잘 대응해 나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렇지만 무역국가인 한국은 안보를 이유로 한 무역 규제조치가 세계무역기구(WTO) 규범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이를 위해서 기능상실에 빠진 WTO를 회복시키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우선 호주가 제안하고 유럽연합 중국 캐나다는 물론 일본도 가입한 WTO 임시상소중재약정에 한국도 새해에는 가입하기 바란다.

차제에 대통령이 세일즈맨으로 나서는 것이 과연 실익이 있는지도 냉철히 따져 보았으면 좋겠다. 비즈니스는 우리 기업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고 정부는 필요할 때 뒤에서 사안별로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 대통령이 세일즈한다고 어느 외국 기업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겠는가. 1980년대 대기업 총수들이 대통령의 해외순방에 동행한 목적은 해외시장 개척보다 대통령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가치나 허세보다 실용이 근간 돼야

신년의 외교과제를 생각하면서도 지난해의 엑스포 유치 실패사례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워낙 어이없는 일이라 외교시스템이 망가진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마지막까지 승리를 예상했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엑스포 개최지와 같은 국제선거는 종반에 가면 대개 윤곽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느 정부인사는 대사들의 희망적 보고를 탓했다는데 사실이 아닐 것이다. 듣고 싶은 정보만 선택적으로 듣고 아전인수격 해석을 한 지휘부에 문제가 있었으리라.

정부가 글로벌중추국가(GPS)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한국은 안보뿐 아니라 경제에 있어서도 취약한 나라이기 때문에 내실 있는 외교가 필요하다. 2024년 한국외교의 근간이 가치나 허세보다 실용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