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김정은의 '조선반도 두 개의 국가론'

2024-01-12 12:07:05 게재
김상준 경희대 교수, '붕새의 날개, 문명의 진로' 저자

연초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의 '(조선반도) 두 개의 국가론'이 보도된 이후 주변 지인들로부터 "당신 책 읽은 것 아닌가"라는 농반진반의 메시지를 자주 받는다. 2019년 출간한 필자의 '코리아 양국체제'를 말한다.

그의 '두 국가 발언'은 지난 연말(12월 26~30일) 조선노동당 중앙위 8기 9차 전원회의에서 나왔다. "북남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한 립장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절박한 요구가 있다"고 천명하면서, "기존의 우리의 조국통일 로선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제도'에 기초한 것이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통일 로선과 상반되는 '흡수통일' '체제통일'을 국책으로 정한 대한민국 것들과는 그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북남관계는 더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되었다"고 못박았다.

험한 말을 앞세웠지만 어쨌든 그쪽 언어로 '조선반도'에 '하나의 조선'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조선과 한국이라는 두개의 국가'가 엄존한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셈이다.

필자가 그동안 주장해 온 '코리아 양국체제'에서 한국과 조선 두 국가 관계는 기본적으로 우호적이며 최소한 중립적이다. 그러나 이번에 김정은은 두 나라 관계가 "적대적"이라 했으니 필자 주장과 정반대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메시지를 보내온 지인들은 "읽기는 읽었는데 거꾸로 읽었네"라며 놀리기도 한다.

현정부 전까지 흡수통일 내세운 적 없어

실제 대한민국은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이후 문재인정부까지 30여년 동안 '흡수통일 체제통일'을 공식적 '국책'으로 내세운 바 없다. 김영삼 대통령의 '민족공동체통일방안',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3단계 통일방안'도 마찬가지다. 이후 노무현정부는 물론이거니와 남북관계가 얼어붙었던 이명박·박근혜정부조차 이 기조를 공식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 기조의 핵심은 통일로 가는 중간단계로 '남북연합'을 설정한 데 있었다. 북측 역시 '남북연합'을 자기 식의 '낮은 수준의 연방제'로 간주하면서 남북대화에 임해 왔다. 그 중간단계의 목적은 통일보다는 항구적 평화 정착에 있다. 이러한 안정적 '평화체제' 정착 없이 통일로 가는 문은 열리지 않는다. 상당한 미래가 될 완전한 통일국가의 체제에 대해서는 지금껏 남이든 북이든 그것이 무엇이라고 분명히 밝힌 바 없다. 먼 미래의 일이니 알 수가 없고 지금 그래봐야 피차 득 될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 30여년의 대한민국 공식 통일정책 기조를 몽땅 부정하고 나선 것이 윤석열 대통령이다. 대선 후보 시절 '북한 선제공격' 발언으로부터 취임 후 북한 주적 발언과 군사적 강경 대응 발언을 이어갔다. 한미 군사훈련의 빈도와 강도는 계속 높여왔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냉전' 바람을 타보겠다는 것과 '북핵'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을 적대감 고조의 땔감으로 써서 지지율을 끌어올려 보겠다는 '안보 포퓰리즘'의 의도가 선명했다.

그럼에도 지지율은 거꾸로 내리막이다. '안보 포퓰리즘' 풀무질을 열심히 하지만 국민들에게 외교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 같은 근본적 불안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신냉전'을 하겠다고 하니 하위 동맹국의 입장에서 전혀 모른 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굳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통에 대놓고 한쪽에 포탄을 팔거나, 민감한 중국-대만 문제에 불쑥 나서서 중국을 비난하는 등의 유별난 돌출행동을, 그것도 거듭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미국도 큰소리를 치지만 여러 분야에서 중국 러시아와 협력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냉전이라고 하면 과거 미소냉전의 '반의 반'도 못 된다. 미국이 이러고 있는데 유럽연합(EU)이나 일본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유독 윤석열정부만 무엇을 믿고 그렇게 강경 일변도일까? 중국과 러시아를 통째로 적으로 돌려놓아서 대한민국에 어떤 이익이 될까? 경제만이 아니라 안보 문제도 그렇다. 중국과 러시아라는 지렛대를 다 버리고 무슨 안보외교를 할 수 있을까?

윤석열정부 강공, 북한 내심 반기는 듯

북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속마음이야 어떻든 북을 외교 대상에서 지울 수는 없는 일이다. 눈앞에 엄연히 존재하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도 그랬다. 대화 통로를 유지하려고 했고 상대를 인정한다고 천명했다. 그런 것이 외교다. 그런데 윤석열정부 들어와서는 그런 '외교의 기본'이 모두 사라졌다. 그래서 국민들은 불안하다. '힘 대 힘 외교'도 '가치외교'도 아니고, 외교를 전혀 모르는 초보자의 불장난 같아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북측의 태도다. 이렇듯 무모하게 튀고 있는 윤석열정부의 '신냉전 닥공 드라이브'를 오히려 내심 반기는 것 같다. 그동안 한국이 반러시아 반중국 전선의 선봉에 나서줌으로써 러중에서 북의 주가를 크게 올려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북측이 최대수혜자가 되었다. 특히 핵·우주 분야에서 러중과 북한의 협력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판이니 어느 신통한 도사는 북측이 신년 첫 주말에 남쪽을 향해 연사흘 포탄을 듬뿍 쏘아준 것을 윤 대통령의 그동안의 '닥공외교'에 대한 심심한 답례로 풀이할지도 모르겠다. 총선이 불과 세 달도 남지 않았다. 이보다 값비싼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한국 선거판에서 '북풍'의 약발은 이제 다한 듯하다. 포탄이 오가도 표심은 덤덤하다. 알 거 다 안다는 식이다. 이 판에 정말 약발 제대로 올려보겠다고 너무나 이상한 작전을 벌이고 싶은 쪽이 혹 있을지 모른다. 위험하다. 거대한 역풍 속에날아가 버릴 공산이 크다. 정보사회다. 좋든 싫든, 비밀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

두 국가 상호인정·공존 다시 가다듬을 때

이런 상황에서 나온 김정은의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발언의 의도를 다시금 생각해본다. 적대적 강경 발언 속에서도 남측을 '대한민국', 그리고 '국가'라고 반복해 호칭하는 데 주목한다. '적대적인' '전쟁 중인' 등의 꾸밈말을 걷어내면 몸말인 '두 국가 관계'가 남는다. 꾸밈말은 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몸말은 계속 남는다. '두 국가 관계'란 표현은 대한민국이 국가라는 사실의 인정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역시 엄연한 주권국가임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이러한 신호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김정은은 2018~2019년 트럼프와의 빅딜을 통해 북미수교를 시도한 바 있다. 북미수교가 이뤄지면 그동안 북한과 수교하지 않고 있었던 일본을 위시한 미국의 강한 지배권에 있는 여러 나라들이 미국을 따라서 북한과 수교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193개 세계 모든 UN 회원국과 수교할 수 있게 된다. 당연히 한국과도 수교하게 된다. 마지막이 아니라 북미수교보다 오히려 앞서 이뤄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런 방식으로 북한의 국가인정은 북한의 체제안보만 아니라 한반도-동북아 평화 담보로 이어질 수 있다. 미국과 빅딜이 불발되고 신냉전이 고조되면서 이 경로에 일시 난관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다. 국제관계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날이 어둡다고 비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2019년 하노이 빅딜의 불발로부터 현재까지 밀려온 어둠의 내력을 돌이켜 깊이 복기하고 반성해야 할 때다. 미완으로 끝난 한반도 두 국가 상호인정과 공존의 전망을 다시금 가다듬을 때 아닌가. 이런 일은 가장 어두울 때가 시작하기 좋다. 봄기운은 동지부터 움트기 시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