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 칼럼

이미지 정치와 1992의 단상(斷想)

2024-01-25 11:39:18 게재
박종권 언론인,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사진 한장이 백마디 말을 한다. 이미지정치 시대 아닌가. 최근 불거진 대통령실과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갈등도 충남 서천의 화재현장에서 사진 연출로 일단 봉합했다. 매체들은 대체로 윤석열 대통령이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어깨를 툭 치며 악수하는 장면을 앞세웠다. 화해에 방점을 찍은 거다. 한 위원장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거나 허리를 90도로 굽힌 이른바 '폴더 인사'를 강조한 매체도 있다. 굽혔다(혹은 졌다)는 의미를 담았을 터다. 반면 딱딱하게 굳은 윤 대통령의 표정과 살짝 미소를 보인 한 위원장을 한 컷에 담은 경우도 있다.

이들도 어떻게 찍힐지 가늠했을 것이다. 둘 다 검사이던 시절부터 미디어를 능숙하게 대한다는 평을 들었다. 윤 대통령이 이마를 드러낸 헤어스타일로 바꾸고, 한 위원장이 두텁고 검은 안경테를 선택한 것도 자신만의 이미지 세팅일 것이다.

한 위원장이 지난 10일 부산을 방문했을 때다. 가슴에 '1992'가 적힌 흰 티셔츠가 부각됐다. 뭔가 메시지가 담겨있을 텐데 잘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머리를 스친 것이 TV드라마 "응답하라~"이다. 첫 시즌의 제목이 '응답하라 1997'이다. 시리즈는 1994와 1988로 이어졌다. 줄여서 '응칠' '응사' '응팔'로 불렀던 레트로 드라마이다. 이 시리즈에 1992편은 없다.

부산이 연고인 야구단 롯데자이언츠가 마지막으로 우승한 해가 1992년이라는 사실은 보도를 통해 알았다. 이른바 '부산갈매기'와 연대감을 강조하려 이미지를 연출했다는 거다. 용의주도한 코디 기획이겠다.

연도에 민감한 세대는 1992에서 YS의 문민정부를 떠올릴 수 있다. 3당합당과 하나회 척결 기억도 소환하면서. 그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며 대통령이 됐지만, 독재와 민주로 나뉜 정치지형을 TK와 PK가 손잡는 지역연대로 바꾼 측면도 있다. "우리가 남이가" 초원복국집 사건이 1992년이다.

세대공감 이끌어 내려는 정치적 몸짓

공교롭게도 한 위원장은 서울법대 1992학번이다. 최근 '86운동권 청산'이라는 깃발을 흔든다. 그의 운동권 청산론에 해당 인사들은 곧바로 반격했다. '운동권에 콤플렉스가 있느냐'는 거다. 5.18부터 6월항쟁까지 반독재 투쟁을 벌이며 고통과 박해를 받을 때 고시를 준비했던 이들은 미안함을 가져야 한다는 거다.

정확한 타깃은 윤 대통령일 것이다. 시기적으로 그렇다. 79학번인 그는 1991년 사법고시에 합격한다. 군부독재와 민중항쟁으로 점철된 격랑의 80년대를 법전을 뒤적이며 관통한 거다. 70년대 X세대로 태어난 한 위원장은 다르다. "나는 5.18 당시에 유치원생이었다"고 되받았다. 그러니 운동권에 빚이 없다는 거다.

세대공감은 정치 캐치프레이즈의 핵심 요소이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20~40대의 지지를 폭넓게 이끌어내는 것도 MZ세대와 직접 공명하기 때문일 게다. 해방 전후에 태어난 세대는 굶주림에 보릿고개를 넘던 기억을 공유한다. "잘 살아 보세~"로 대표되는 박정희 산업화시대에 대한 추억이 아직도 짙다.

베이비붐 세대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충돌기를 살았다. 이들은 YS와 DJ로 상징되는 반독재 투사들에게 정치적 민주화를 빚졌다. 노동자 편에 섰던 노무현 노회찬 등에게는 사회경제적 정의에 부채감이 있다. 1987년을 거리에서 보냈던 운동권에 당시의 '넥타이 부대'는 동질감을 가질 법하다. 이명박은 샐러리맨의 신화로서 "부자 되세요~"로 동세대의 욕망을 자극했고, 박근혜는 부모가 총탄에 쓰러졌다는 애잔함이 감성을 두드린 측면이 있다.

이런 세대의 역동성은 흙수저와 금수저 서사를 배양했다. 금수저는 부러져도 금이다. 하지만 불에 녹는다. 흙수저는 불에 구워져 값비싼 도자기가 되지만 부서지면 도로 흙이다. 그래도 흙은 마침내 꽃을 피운다.

세대공감을 세대갈라치기로 변주한 정치인이 이준석 대표라고 본다. 그는 '세대포위론'을 앞세워 지난 대선을 이끌었다. 산업화세대와 MZ세대로 민주화세대를 에워싼다는 전략이다. 여하튼 결과는 통했다고 할 수 있겠다. 대선에서 승리했으니까.

산업화 민주화는 자유의 필요충분조건

여기서 힌트를 얻은 것일까. 최근 한 위원장이 연일 "운동권 패권주의 청산"을 외친다. 민주화운동 경력을 가진 정치인이 민주당에 상대적으로 많은 상황을 고려했을까. 그는 24일에도 숭실대에서 대학생들과 만나 "운동권 정치인들에게 죄송한 마음은 전혀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산업화와 민주화는 진정한 자유의 필요충분조건일 것이다. 따로 떼어 호불호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정의하기 모호하다고 해서 붙여진 X세대는 '곱하기' 역할이다. 나눗셈 뺄셈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곱셈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곱해 더 풍요로운 MZ세대로 이끌 세대다.

모든 세대는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그런데 어느 세대이든 기여를 1로 하는 곱셈은 덧셈보다 못하다. 더욱이 0으로 부정하면 아무리 곱해봐야 0이 아닌가.

박종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