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141년 비사 19 주미공사 이범진과 헤이그밀사 이위종

대를 이어 자주독립 의지를 보이다

2024-02-02 00:00:00 게재

한종수 한국 헤리티지연구소 학술이사
1월 26일은 주 미국공사와 주 러시아공사를 지낸 이범진이 자결한 날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공사관은 폐쇄된다. 아파트로 옮겨 계속 업무를 보았으나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되자 나라를 잃은 울분에 고종에게 전할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다. 향년 59세였다.

황제 폐하께

우리의 조국 대한제국은 이미 죽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모든 권력을 빼앗겼습니다. 소인은 적을 토벌할 수도, 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무기력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소인은 자결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소인은 오늘 생을 마감합니다.

자결하기 전 장례비를 제외한 전 재산을 독립운동단체에 보낸 후 자신의 아파트에서 목을 맨다. 이범진 공사는 고종과 왕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시키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주역이자 러시아 외교 활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알려져 왔다.

조선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그의 첫 부임지는 미국 워싱턴DC였다. 이범진은 주미공사로 임명된 1896년(건양 원년) 6월 20일부터 1897년 1월 31일까지 약 7개월간 일기 형식의 기록인 ‘미사일록(美槎日錄)’을 남긴다. 그는 자신의 부임 경로와 미국측 인사 접견 내용, 미국 주요 기관과 문화시설 등을 답사한 내용을 자세히 기록한다.

‘미사일록’은 주미공사로서 외교 활동, 당시 영어 사용용례 및 표기, 19세기 말 지식인으로서 서양 국가에 대한 인식 수준 등 다양한 역사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어 2023년 10월 국가등록문화재 제849호로 등록됐다. 이제는 개인 기록물을 넘어 시대의 기록이자 문화재로 그 가치가 격상된 것이다.

이범진은 미국행을 준비하며 서재필을 방문해 미국 부임 경로, 풍속 및 의절 등 정보를 수집하고 소실 박씨와 차남 이위종(李瑋鍾, 1887~?)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난다. 1888년 초대 서기관 이완용과 번역관 이채연은 부임 이후 병을 이유로 조선으로 돌아온 후 1889년 1월 미국 워싱턴DC로 귀임하며 부인들과 동행한 경우는 있으나 처음부터 부인과 가족을 인솔하여 부임한 것은 이범진이 처음이다.

주미공사 이범진과 부인, 아들 이위종 사진 《The Puritan》(1897년 11월)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동행한 둘째 아들 이위종이다. 이위종은 헤이그 특사로 네덜란드에서 세계만방에 일제의 만행을 알렸던 청년으로만 일반인에게 알려져 있다.

이범진의 첫째 아들인 이기종(李璣鍾)은 미국 학교 다니기를 원해 아버지를 따라 미국행에 나선다. 1898년 11월 20일경 미국 워싱턴DC에 도착, 다음해인 1899년 3월 버지니아주 세일럼(Salem) 지역의 로아노크대학(Roanoke College)에 입학한다. 이 대학 출신으로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과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미주 한인독립운동의 지도자 송헌주(宋憲澍),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전 주미공사 서광범 등이 있다.

둘째 아들 이위종은 1896년 9월 10일경 아버지 이범진과 어머니와 함께 워싱턴DC에 도착해 2개월 뒤인 11월 2일 워싱턴DC의 한 공립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이브닝스타(THE EVENING STAR)’ 기사에 따르면 다른 또래의 아이들보다 월등히 앞선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특히 “1899년 3월 현재 13살 6학년으로 데니슨빌딩(Denison building)에 소재한 학교에 재학 중이며, 방과 후 개인교습을 진행해 내년에는 그래머 스쿨(grammar school)로 월반이 확정되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그는 방과후 개인 교습을 받고 있었고, 다른 친구들보다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기사 중 일부를 옮기면 아래와 같다.

타고나길 명석한 기지, 예리한 관찰력, 철저한 학습력, 빠른 상황 판단, 빼어난 기억력, 잘 발달된 추리력, 생기 있고 발랄한 성격, 눈에 띄는 예의 바름, 그가 가진 이 모든 미덕들로 보아 그의 미래는 밝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영어를 이해하는 수준은 거의 그의 이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극히 사용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나쁜 필체를 갖고 있지도 않는 등, 언어 사용에 결코 실수가 없다. 그의 부모가 한국어로 말하는 속도 그대로 그들의 말을 통역해내니, 부모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또 이위종은 아버지를 따라 공식적인 모임과 사교적인 모임에 함께 참석하곤 했다. 정중하고 예의바른 모습은 귀부인들에게 좋은 인상과 모습을 남겼다. 이위종은 친구들과 운동경기 중 자신을 조롱한 친구를 잡아가달라며 경찰서로 전화해 ‘잡아넣지 않겠다면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는 일화도 담겨 있다.

뉴욕데일리 트리뷴 ‘어린이 코너’에 실린 이위종의 기고

그는 1900년 3월 중순 무렵에는 뉴욕에서 시간을 보내며 ‘뉴욕데일리 트리뷴(NEW-YORK DAILY TRIBUNE)’의 어린이 코너(Children’s Corner)에 자신을 소개하는 글을 보낸다.

자신의 애칭은 ‘죵(Chong)’이라며 13세라고 소개했고, 대한제국 특사로 파견된 아버지 이범진과 대한제국의 위치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워싱턴에서 수년간 학교를 다녀 영어가 유창해 아버지 통역사로서 역할도 했다. 시끄러운 뉴욕보다는 워싱턴을 좋아하고 수많은 현대영어 소설 중에서도 세익스피어 작품을 좋아하는 학생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기사에는 이위종 개인사진은 없으나 한국어로 ‘쭁위니’, 영문으로 ‘Chong We Ye’로 쓴 친필 사인을 확인할 수 있다.

10세 전후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미국 워싱턴DC에서 공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이위종은 훗날 1907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자주독립의지를 펼치며 활약한다. 그의 어린 시절 기록과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한 그의 아버지 이범진의 애국심을 보면 성년이 된 그의 활약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참고자료

1. 《The Morning Times》 , (1896.9.10.)

2. 《The Puritan》(1897.11.)

3. 《THE EVENING STAR》 COREAN LEGATION,

(1899.3.11.).

4. 《NEW-YORK DAILY TRIBUNE》 Children‘s Corner (1900.3.25.)

5. 이범진 저, 김철웅 역, 《미사일록》, 푸른역사(2023)

6. 한종수, <주미공사 이범진의 활동 연구> , 《문화콘텐츠연구》 40(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