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 칼럼

발바닥 가려운데 신발 신고 긁은 ‘특별대담’

2024-02-08 13:00:01 게재

날카로운 질문도 속시원한 대답도 없었다. 그저 잘 다듬어진 홍보영상 한편이었다. 도대체 얼마만인가. 윤석열 대통령이 TV를 통해 기자와 질의응답 하는 모습 말이다. 기자회견은 2022년 8월 취임 100일을 맞아 가진 이후 없었다. 소통하는 대통령의 상징이던 도어스테핑도 60회만에 중단되지 않았나. 거의 1년 6개월 만에 특별대담 형식이나마 TV에 출연한다 하니 관심이 집중됐다.

그런데 제목부터 글쎄다 싶었다. ‘대통령실을 가다’라니. 대통령실이 금역(禁域)이라도 된다는 것일까. 그래도 신년기자회견을 갈음하는 차원이라면 ‘대통령과 현안 즉문즉답(혹은 백문백답)’ 쯤이 낫지 않을까. 결론적으론 ‘대통령실…’로 이름 지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프로그램은 배경음악을 깔고 중간중간 자료화면도 삽입해 나름대로 편집의 묘(妙)를 살렸다. ‘미니 다큐’ 형식이라고 한다. 짜여진 각본도 쓰여진 대본도 없이 진행됐다는 설명이 붙었다. ‘약속 대담’이 아니라는 거다. 대담의 핵심은 주권자를 대신한 송곳 같은 질문일 것이다. 그런데 질문도 대답도 원론적이거나 살짝살짝 핵심을 비켜가는 느낌이었다.

국회 입법에 대한 9차례 거부권을 거론했다. 정작 김건희 도이치 주가조작 특검 거부는 캐묻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후보 시절 “오히려 4000여만원 손해봤다”는 주장을 견지하는지, 검찰이 재판과정에서 제출한 “최소한 22억9000만원의 이익을 취했다”는 의견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야 하지 않나. 최근 불거진 윤-한 갈등에 대해서는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사퇴 요구를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밝힌 데 대해 정말로 사퇴를 요구했는지 물어야 하지 않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 끝난 대담

지금은 이른바 생성형 인공지능(AI) 시대다. 시대적 변화의 핵심은 ‘질문의 힘’이다. 제대로 질문하면 대체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다. 어설프게 질문하면 엉뚱한 대답을 듣는다. 묻지 않으면 답도 없다.

가장 중요한 저출산 문제도 요령부득이다. 관련 위원회를 효율적으로 가동하겠다고 한다. 가정 중시와 휴머니즘도 중요하다고 한다. “목련 꽃 피면 김포가 서울 된다”고 하는데, 지방균형발전이 저출산 대책이라고 한다. 이때 차라리 기업들의 출산장려 시책에 정부가 어떻게 지원할 건지 묻는 게 어떨까. 중소기업 실크로드시앤티가 작년부터 시행중인 직원 출산장려금 1000만원, 올들어 나선 부영그룹의 출산장려금 1억원에 소득세나 증여세를 부과하는 것이 마땅한지 정부의 견해 말이다.

또 윤 대통령과 한 비대위원장이 수사해서 기소했던 김관진 김기춘을 사면한 것은 사면권의 남용이 아닌지, 자신들이 기소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데 대해 검찰의 기소권 남용이라는 의견이 있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야 하지 않나. 특별 대담을 듣고서도 답답한 것은 이렇게 묻고 싶은 게 남아서 그럴 것이다. 마치 발바닥이 가려운데 신발을 긁는 느낌이랄까.

특히 관심이 집중된 김건희 여사의 고가 파우치 문제가 그렇다. 윤 대통령은 “(김 여사가) 단호하지 못해 아쉬운 점이 있다. 시계에 몰래 카메라까지 설치했기 때문에 선거 앞둔 정치공작이다. 이런저런 인사의 접근을 박절하게 막지 못한다면 제2부속실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 이때 부부는 경제공동체인데 뇌물이거나 김영란법 위반 아니냐, 국가기록물로 격상된 문제의 파우치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물어야 하지 않나.

영화에 ‘쿨레쇼프 효과’란 용어가 있다. 러시아의 영화제작 레프 쿨레쇼프가 제시한 이론이다. 편집과 컷을 이용해 관객에게 감정적 영향을 미치는 기법이다. 무표정한 주인공 얼굴에 이어 갓난아이 장례식 음식을 차례로 보여주자 관객들이 주인공의 표정에서 기쁨 침통함 배고픔을 느꼈다는 것이다.

예컨대 강아지와 함께 즐기는 윤 대통령 부부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개식용 금지법을 거론하고는 김 여사 고가 파우치로 넘어간다. 윤 대통령은 김 여사의 부친이 중학생 때 사망했다면서 이를 빌미로 접근한 사람을 박절하게 자르지 못해 아쉽다는 식으로 정리한다. 사과도 유감표명도 없이.

명품백 논란, 사과도 유감표명도 없어

이번 대담은 편집에 사흘이 걸렸다. 악마의 편집은 의도적으로 자르고 붙여 선의의 출연자를 악마로 만든다. 천사의 편집도 있다. 영웅이나 모범시민으로 이미지를 조작하는 거다. 그렇지만 천사의 편집이 출연자에게 늘 좋은 건 아니다. 연출된 이미지와 실제의 간극이 크면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

소통은 민주주의의 기반이자 신뢰의 바탕이다. 자유로운 쌍방향 소통이 아닌 자문자답형 소통은 권위주의 냄새를 피우며 불신을 뭉게뭉게 일으킨다.

현재 국가에 가장 중요한 현안이 민생경제와 안보일 것이다. 공자님 말씀을 빌리면 족식(足食)과 족병(足兵)이다. 여기에 더 중요한 것이 민신(民信), 즉 시민의 신뢰이다. 신뢰를 잃으면 정치는 설 곳이 없다. 정치가 바로 서지 못하면 피해는 시민의 몫이다.

언론인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