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철규 칼럼

반도체산업 전쟁, ‘하던 대로 열심히’ 하면 안될 것 같다

2024-03-06 13:00:01 게재

근자에 유달리 한국 반도체산업계에 위기경보라고 할 만한 소식이 잦다. 인공지능(AI)이 본격화되기 전 반도체시장은 중앙처리장치(CPU)와 메모리시장으로 구성됐고, 양 시장은 인텔과 삼성전자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2018년 미국 트럼프정부가 반도체를 포함한 첨단산업에서 중국 견제를 본격화할 때만 해도 한국의 반도체산업이 가장 큰 수혜자로 꼽혔다. 한국의 첨단 제조업에 대한 중국의 기술추월이 예상되고 있던 터라 미국의 견제가 중국의 추월을 늦출 수 있을 거라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2년 말 챗GPT가 등장하고 뒤이은 AI의 급속한 발전과 진화로 글로벌 반도체시장 판도가 확 바뀌었다. CPU 대신 그래픽처리장치(GPU)가 그 자리에 들어서고 D램 대신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 D램을 여러층 쌓아 올린 고용량 메모리)가 자리를 차지했다.

지금 반도체시장의 주연은 GPU의 엔비디아와 맞춤형 반도체를 만드는 파운드리의 대만 TSMC다. 삼성전자가 주연에서 문득 밀려났다. 삼성전자는 CPU도 GPU도 없는데, TSMC를 추격하는 것도 제자리걸음이다. HBM도 SK하이닉스에 많이 뒤쳐졌다. HBM이 메모리반도체시장의 중심이 되자 삼성전자가 장악하고 있던 기존 D램 시장은 주문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아니 메모리반도체 시장과 시스템반도체 시장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미국 일본 공세에 한국 반도체산업 직격탄

미국의 중국 견제는 한국에 수혜를 가져다주기보다는 오히려 미국과 일본이 자국의 반도체산업을 복구하고 부활시키고자 하는 산업정책을 촉발시키고 급격히 강화했다. 지난 2월 21일 CPU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인텔이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 2024’라는 행사를 개최하고,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나 삼성전자보다 앞서서 최첨단 공정을 시작하겠다고, 그래서 파운드리 시장에서 올 1분기부터 삼성전자를 앞서겠다고 공언했다. 삼성의 파운드리 세계 2위 타이틀을 빼앗겠다는 것이다.

아직 양산이 가능한지 확인도 안된 상태에서 마이크로소프트가 6조6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칩 생산을 인텔에 맡기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리고, 엔비디아도 GPU와 HBM을 패키징한 물량을 주문할 것이라는 소식도 있었다. 인텔 스스로도 이미 150억달러어치 일감을 따냈다고 밝혔다.

팻 겔싱어 인텔 대표(CEO)는 “현재 반도체 생산의 80%를 아시아에 의존하고 있지만 10년 안에 아시아와 서구권의 반도체 생산 비중을 50 대 50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더해 미국정부가 100억달러 규모의 보조금을 인텔에 제공하기로 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쯤 되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 삼성전자와 TSMC를 인텔로 대체하겠다는 구상에 미국정부와 업계가 합의했다고 할 수 있겠다.

2월 26일(현지시간)에는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HBM3E’라는 이름의 HBM을 세계 최초로 양산을 시작했고 엔비디아의 AI 반도체에 적용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이번에는 SK하이닉스가 직격탄을 맞는 모양새이다.

일본은 반도체산업을 부활시키겠다는 기치 아래 2019년부터 TSMC 공장을 유치하려고 했다. 그 결과가 2월 24일 TSMC 구마모토 제1공장 개소로 나타났다. 일본 경제산업장관이 참석한 행사에서 TSMC의 창업자 모리스 창은 “일본 반도체 르네상스의 시작이라고 믿는다”라고 화답했다. 제2공장 착공관련 소식도 뒤이었는데, 2개의 TSMC 공장에만 1조2020억엔(10조6000억원대)의 보조금이 지원된다.

그리고 2022년 일본정부가 주도해서 설립하고, 거의 전부 정부 보조금으로 공장을 짓는 일본의 파운드리업체 라피더스가 있다. 라피더스는 캐나다의 반도체설계업체 텐스토랜트사로부터 AI칩 생산을 수주했으며 미국 IBM의 최첨단 반도체제조기술을 전수받아 양산할 예정이라고 한다.

인텔이 허풍치는 것 아닐까. 과거 일본정부가 합병을 주도했던 엘피다가 파산했듯 라피더스같이 정부가 주도하는 업체로 TSMC나 삼성전자를 이길 수는 없을 거다. 이런 분석들은 당연히 합리적인 추정이고 상당한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정부의 반도체산업 부활 정책이 갈수록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이 ‘2차 반도체지원법’을 언급한 것도 걸린다.

정부와 업계, 전략적 대응책은 하고 있나

반도체 생산 80%이던 아시아 비중이 50%로 줄게 되면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게 될까.

2월 메모리 반도체 수출이 전년동기비로 66.7% 늘었고, D램 가격도 회복세라는 산업통산자원부의 보도자료가 왠지 허망해 보인다. 그보다는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이 처음으로 중국에 추월당한 것으로 나타났다’라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보고가 더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 한국의 반도체산업계와 정부는 30여년 만에 판이 바뀌는 이 상황에 어떤 전략적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냥 하던 대로 열심히!’ 정도로는 안될 것 같다.

성공회대 교수 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