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 칼럼

무채색 정치의 색깔론

2024-03-07 13:00:02 게재

미국 대선판이 달아오르고 있다. 연방대법원이 지난 4일 트럼프의 대선 후보 출마자격을 박탈한 콜로라도주 대법원 판결을 뒤집은 거다. 이어 니키 헤일리 공화당 주자가 사퇴하면서 전현직 대통령 리턴 매치가 사실상 확정됐다. 현대의 대부분 선거가 그렇듯이 결국 경제가 승부를 가를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민자를 포함한 국경 문제와 낙태권이 표심의 표적이 된 듯하다. 정당 기반의 선명한 정책대결의 한 단면이겠다.

물론 네거티브도 있다. 트럼프측은 바이든의 고령을 문제 삼는다. 선거일인 11월5일 기준으로 바이든은 81세, 트럼프는 78세이다. 도긴개긴 아닌가. 바이든과 동갑인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올드보이가 아니라 스마트보이”라고 한다. 비록 트럼프의 후보 자격은 유지됐으나 진행중인 여러 재판의 결과에 따라 여론의 향배는 달라질 수 있다. 피의자 대선 후보인 셈이다.

한국의 총선판도 미국 대선과 얼핏 닮았다. 윤석열 현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대 대선에 이어 리턴매치를 벌이는 느낌이랄까. 국민의힘은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내세워 이-한 대결로 프레임을 전환하려 하지만 민주당은 윤-이 대결의 연장전으로 몰고 가는 듯하다.

하지만 미국과 달리 정책대결은 흐릿하다. 상대에 대한 혐오와 네거티브만 난무한다. 민주당은 검찰독재 심판을, 국민의힘은 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내세운다. 우리 선거판의 결정구조가 된 ‘최악 대신 차악’ 프레임의 확장이다. 진영대결에는 희망과 비전보다 네거티브가 효과적이라는 것일까.

권력의지 말고 정치적 색깔 안보여

따지고 보면 20대 대선은 정치 불신이 바탕이었다. 정확히는 청와대에 대한 실망과 여의도에 대한 환멸이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의 공통점이 ‘여의도 0선’인 이유다. 국민은 기득권 정치의 타파를 원했던 거다. 정치인을 수사해서 정치를 알고, 경제인을 수사해서 경제를 안다는 특수통 검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배경이겠다.

그런데 선거일로부터 딱 2년이 지난 지금 어떤가. 1300만 관객이 든 ‘서울의 봄’에서 국민은 기시감 혹은 현 정치를 빗댄 시대극 느낌을 받는다. 과거 군부의 자리에 정치검찰을 대체한 모습으로 말이다. 야당은 어떨까. 민주화를 위해 맹렬하게 저항하던 자리에 과연 인권과 국민주권을 앞세워 강렬하게 맞서기는 했나. 그저 여야 모두 위인설당(爲人設黨) 대신 위인개당(爲人改黨)에 매진한 것은 아닌가. 여당이 줄 세우기로 사당화를 구축한다면 주류와 비주류의 공존이 전통인 야당은 배제와 진영 안의 진영을 통해 사당화로 치달은 것 아닌가.

여의도 정치를 비판하며 기대를 모았던 ‘0선’들이 오히려 복고풍 여의도로 뒷걸음치고 있는 형국이다. 윤-이의 권력지향 때문만은 아니다. 야당의 5선 의원에 이어 국회부의장을 지낸 4선 의원이 여당으로 당적을 바꾼다. “입당도 자유, 탈당도 자유”라 지만 이래서야 정당정치라고 할 수가 있겠나.

그러니 ‘말로만 보수 무늬만 진보’인 여야가 실제로는 ‘초록동색’으로 비친다. 섬뜩하도록 선명한 권력의지 말고 정치적으로 뚜렷한 색깔이 어디 있나. 미국의 이민자와 낙태권처럼 차별화된 정책이 있기는 하나. 국민의힘 강령 1조에 기본소득, 3조에 경제민주화를 적시하고 있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이재명의 민주당과 무엇이 다른가.

정당의 상징색도 그렇다. 내내 파란색을 유지하던 국민의힘 전신은 2012년 빨간색으로 바꾼다. 녹색을 견지하던 민주당 계열은 2013년 재빨리 파란색으로 전환한다. 이후 보수진영이 야당을 향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빨갱이 정당”이라는 비판에 녹이 슬었다. 그래서일까. 국민의힘은 2020년 빨간색에 파란색과 흰색을 덧붙이고는 “다양성을 담았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녹색부터 청색까지 아울렀다가 지난달 24일 이재명 대표가 좌청우록(左靑右綠) 중앙에 보라색을 둔 새 상징을 발표했다. 민주 희망 미래를 담았다고 한다. 보라색은 진보당의 상징색이다. 마치 민주당과 진보당의 연대를 암시하는 듯하다는 항간의 평가는 견강부회와 오비이락 사이에 있겠다.

이낙연 새로운미래와 이준석 개혁신당이 갈라선 이유 중 하나도 상징색 입장차이가 있다고 한다. 새로운미래는 프러시안 블루, 개혁신당은 보수와 진보를 합친 오렌지색이다. 만일 빨강 노랑 파랑으로 절충했다면 통합이 유지됐을까.

정책적으로 선명한 색깔정치 보고 싶다

정당의 색깔은 색깔론 정치만큼 부질없다. 좋다는 색을 다 합쳐봐야 검정색이 된다. 그저 흑백논리에 기대 혐오만 부추기는 무채색 정치가 횡행한다. 하다못해 초등학교 반장선거도 자신의 비전을 내세울 뿐 상대 단점을 물고늘어지지 않는다.

권력에 눈이 먼 무채색 정치는 방송 뉴스의 색상마저 트집잡는다. 이제 파란 하늘도 붉은 노을도 노란 개나리도 상큼한 오렌지도 모두 다 정치 프로파간다에 활용될 판이다. 제발 아전인수 흑백 공세 말고, 공연한 색깔 트집 말고, 진정 정책적으로 선명한 색깔 있는 정치를 보고 싶다.

박종권 언론인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