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남식의 중동 톺아보기

기로에 선 자유주의의 시대

2024-03-12 13:00:04 게재

지난 80년은 인류 역사상 이례적인 시대였다. 민주주의가 정치발전의 순경로라 믿었다. 자유무역이 경제학의 상식이었다. 유럽은 한발 더 나아가 화폐도 하나로 묶고 정치체제도 합쳐가며 통합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한줄 알았던 상식들이 이젠 하나둘씩 무너지고 있다. 굳이 혼란을 겪으며 민주화하느니 안정된 권위주의가 낫다는 생각들이 굳어지고 있다. 자유무역도 도전을 맞았다. 유럽 각국은 국경을 높이는 중이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나 헝가리 오르반정부의 행보는 유럽통합의 미래에 드리운 암울한 전조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모습이 인류 역사의 본모습이 아니었을까. 제국의 지위를 가진 강대국들이 굳이 질서와 가치를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압도적 힘을 가진 제국들은 바깥 세상을 정복하고 착취하면 그만이었다. 정의는 강자의 규범이라는 고대 소피스트 트라시마커스의 주장은 자연스러웠다. 지극히 본능적이고 자연스런 제국의 행태였다. 대영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의 독특성이 만든 지난 80년 질서

그렇다면 지난 80년이 이례적인 시대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제국적 지위를 가졌던 미국의 독특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강대국 미국은 기존 인류 역사에서 제국들이 보여준 일반 행태와는 사뭇 달랐다. 미국은 2차대전 승전 후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적어도 공산권이 아닌 자유진영에서만큼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초토화된 유럽 재건을 위해 브레턴우즈체제를 만들어낸 것은 제국의 상식과 통념상 이례적이었다. 패전국 독일과 일본의 부흥을 견인한 것도 지금 되짚어보면 극적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공동선의 기준으로 내세웠다. 제국의 일반적 행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압도적 힘을 가진 나라가 굳이 공들여 나라들을 모으고 함께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미국은 그 길을 택했다. 행태만 보면 ‘온건한 제국(benign empire)'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냉전 영향이 컸다. 그리고 약탈적 제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세계시민 의식의 각성이 뒤따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자기보다 힘이 약한 나라들을 모아 설득을 통해 질서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선택은 독특한 게 사실이었다. 미국이 본성상 더 선해서 손해를 감수하며 질서를 만든 것은 아니었다. 품은 들지만 질서를 통해 얻는 이익이 힘의 배타적 사용을 통해 얻는 이익보다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냉전이 무너졌을 때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이었다. 너도나도 “팍스 아메리카나 (Pax Americana)”를 이야기했다. 마침 사담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응하는 미국 주도의 ‘사막의 폭풍 작전’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가공할 만한 군사력의 미국이 영토침탈의 반칙을 용납하지 않음을 만방에 알린 계기였다. 이제 미국이 견인하는 자유주의 질서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그러나 새 세대를 풍미할 것으로 여겨졌던 팍스 아메리카나는 꼭 10년 갔다. 2001년 9.11이 터졌고, 이에 다시 미국은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을 통해 강력한 유일초강대국의 제국적 지위를 보여주려 했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두 전장에서의 승리’를 장담하며 중동과 동아시아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해도 이길 수 있음을 자신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라크에서 사담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빠르게 무너뜨렸다. 네오콘 주도의 대외정책은 무모해보였지만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역설이 발생했다. 불량한 정권을 교체하겠노라 선언하며 이슬람권에 개입하면서 기존의 질서 선도자의 이미지에 타격이 왔다. 미국의 힘은 관용과 질서에 있다. 그러나 힘을 통해 판을 바꾸려는 모습에 국제사회는 갸우뚱했다. 부시독트린과 그에 따른 테러와의 전쟁은 9.11 트라우마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바깥의 시선으로 볼 때는 일방주의로 비쳤다.

각성하기 시작한 미국의 유권자들

탈냉전기에 이미 분화되기 시작한 세상의 복잡성, 그 이면에서 끓고 있던 엔트로피의 세계는 어지러웠다. 이라크는 점점 지옥도가 되어갔고 탈레반의 저항은 20년간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유권자들은 전쟁의 의미와 효용성을 되물었다. 사담을 축출한 이라크는 이란의 영향력에 편입되는 징후가 나타났다. 이라크와 시리아에서는 알카에다보다 더 극악한 IS가 출현했다. 미국을 비롯한 나토 동맹국들은 20년 동안 게릴라 탈레반 하나 없애지 못했다. 압도적 군사력으로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안정화, 관리전략 및 국가건설까지의 역량은 부족했음을 미국 내에서 각성하기 시작했다.

슬픔 속에 시신으로 운구되어 오는 미 장병들의 모습을 10년 넘게 지켜보는 미국 유권자들은 서서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 자유주의 질서 수호의 명분으로 수행하는 전쟁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 했다. 그리고 거칠게 되물었다. 트럼프 진영의 도발적인 표현은 미국의 전통적 외교와 리더십을 주장하는 엘리트들에게 무척 아팠다. “전쟁은 바닷가 사람들(워싱턴 뉴욕 보스턴)이 결정하고, 정작 보디백에 담겨 시신으로 돌아오는 젊은이들은 중부 어딘가 레드넥의 자녀들이다.”

그동안 미국의 이중성과 위선적 속내에 관한 비판은 많았다. 그러나 역으로 말하면 위선적이라는 말은 그래도 ‘선’하다는 가치에 관한 인식의 공유를 전제로 한다. 그렇기에 미국내 학계 언론 시민사회에서 자국의 이중성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다.

물론 이란콘트라 사건이나 아부그라이브 감옥 인권유린 등 미국이 비난 받은 사안도 적지 않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비판을 받을 만했다. 그래도 미국은 이중적이고 위선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미국 유권자들은 “도대체 왜 우리가 이런 소리까지 들어가며 질서 유지를 맡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정글의 생존질서 익히는 게 시급

최근 홍해 정세도 마찬가지다. 후티반군의 항행 방해에 대해 미군이 대응하자 호전적 행동이라는 내외 비판도 잇따랐다. 이 때 고립주의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호르무즈 석유 물류에 관심없다. 교역만 놓고 보면 홍해는 동아시아에게 절박한 항로들인데 미 함대가 지켜주고도 욕을 먹는다면 굳이 있어야 하는가.”

작년 3월 사우디와 이란이 중국 중재로 국교 정상화를 했을 때 워싱턴에서는 아예 중동을 관할하는 미 5함대를 빼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사우디와 중국을 이어주는 석유항로를 미국이 지켜주었고 돈은 사우디와 중국이 벌었는데 정작 미국이 뒤통수를 맞았다는 분노 때문이었다. 물론 사슬처럼 연결된 국제무역의 본질을 외면한 생각이고 전략가치상 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직관적인 비판이었고 관여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 정서는 분명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도 점차 관여를 줄이고, ‘정상적(?)’인 또는 ‘자연스러운’ 대국노릇만 하는 쪽으로 가는 듯하다. 미국의 유권자들이 더 이상 세상에 관여하며 의미없는 피를 흘리는 일 하지 말고, 국경 높여 우리끼리 잘사는 게 우선이라는 '미국 민족주의'로 점점 기울고 있는 느낌이다. 탓하기 어렵다. 마을 이 집 저 집을 관리하던 정원사가 일을 접고 자기 집 앞뜰에만 집중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담을 높이고 있다. 결국 담장 바깥은 알 수 없는 풀들이 무성하게 자란다. 로버트 케이건이 말한 '정글이 다시 자라는 세상'이다.

올 11월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이 속도는 가속화될 것이고, 바이든이 재선되면 그나마 속도를 제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큰 방향은 이미 정해졌다. 어려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하지만 염려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가꾸어진 정원의 질서는 이제 사라지더라도, 정글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을 것이다. 하루빨리 그 무시무시한 정글의 생존질서를 익히는 것이 시급하지 않겠는가.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전략지역연구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