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섭 조기귀국에 압박 커진 공수처

2024-03-21 13:00:10 게재

압수물 분석·관련자 조사도 안 끝났는데 여권 ‘신속 조사’ 촉구

‘형식적 조사’ 우려 … ‘자진 출석’ 송영길 소환은 8개월 걸려

해병대 채 모 상병 순직 사건 외압 의혹으로 수사받는 이종섭 주호주 대사가 21일 인천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영종도=연합뉴스 김성민 기자
해병대 채 상병 순직사건 수사 외압 의혹의 핵심 피의자인 이종섭 주호주대사가 전격 귀국하면서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난처해진 모습이다. 아직 이 대사를 수사할 단계가 아닌데도 그를 즉각 조사하라는 압력이 커지고 있어서다.

이 대사는 21일 오전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지난 10일 출국한지 11일 만이다. 오는 25일부터 열리는 방산협력 주요 공관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지만 총선을 앞두고 민심이 크게 악화되자 서둘러 귀국시켰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이 대사는 국방부 장관이던 지난해 7월 집중호우 실종자를 수색하다 순직한 채 상병 사건과 관련한 수사에 외압을 행사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외압 의혹의 당사자인 그는 이달 4일 호주대사로 임명됐는데 뒤늦게 출국금지 상태였던 것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다.

그럼에도 이 대사가 4시간 가량 공수처 조사를 받은 뒤 출국금지 조치가 해제되면서 호주로 출국하자 ‘도주대사’ 등의 비판이 이어졌다. 특히 총선을 앞둔 여당에 악재로 작용하면서 국민의힘 내부에서조차 이 대사가 귀국해야한다는 요구가 나왔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17일 “공수처는 즉각 소환하고 이 대사는 즉각 귀국해야 한다”고 한 바 있다.

이날 이 대사가 귀국함에 따라 공수처에 대한 여권의 압박은 더 커질 전망이다. ‘이 대사 임명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수사하지 못한 공수처가 문제’라는 프레임 전환을 시도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그만큼 이 대사에 대한 신속한 조사를 촉구할 것으로 보인다.

이 대사는 인천공항 도착 직후 기자들과 만나 “체류하는 기간 동안에 공수처와 일정이 조율이 잘 되어서 조사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앞서 이 대사는 지난 19일에도 ‘조사기일 지정촉구서’를 공수처에 제출한 바 있다. 빠른 시일 내에 조사 기일을 잡아달라는 취지다.

문제는 그동안 공수처 수사 진행상황으로 봤을 때 당장 이 대사를 조사해도 실익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공수처가 수사를 본격화한 것은 지난 1월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과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 박진희 전 국방부 군사보좌관 등을 압수수색하면서다.

통상 압수물을 분석하고 아랫사람을 상대로 사실관계를 확인한 뒤 윗선을 불러 진술을 받아내는 식으로 수사가 진행되는데 공수처 수사는 아직 압수물 분석 단계에 머물러 있다. 김 사령관이나 유 법무관리관에 대한 소환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아직 ‘윗선’에 해당하는 이 대사를 부를 단계가 아니다. 조사가 이뤄져도 형식적이 될 수밖에 없다.

검찰 출신 한 변호사는 “조사 준비가 돼 있는 상태에서 피의자가 조사를 받겠다고 하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만 수사기관이 준비가 안 돼 있는데 피의자가 원한다고 조사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검찰이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사건과 관련해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의 조사 요구를 거부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민주당 돈봉투 의혹이 제기되자 프랑스에 있던 송 전 대표는 지난해 4월 귀국해 자신을 빨리 조사하라고 요구했다. 지난해 5월 2일과 6월 7일에는 서울중앙지검에 스스로 출두하기까지 했지만 검찰은 “조사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거부했다.

당시 검찰 관계자는 “형사사법 절차는 모두에게 공정해야 한다”며 “소환조사는 수사의 한 방식으로 수사팀이 실체 규명을 위해 필요한 시기에 부르는 것이지 피조사자가 일방적으로 요구하거나 재촉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했다.

법무부 장관이던 한 위원장도 송 전 대표의 자진 출석에 대해 “수사는 일정에 따라서 진행되고 있는데 본인 마음이 다급하더라도 절차에 따라 수사에 잘 응하면 될 것 같다”고 했었다.

실제 송 전 대표에 대한 검찰 조사는 그가 귀국한 지 8개월 가까이 지난 지난해 12월에 이뤄졌다.

한 위원장을 비롯한 여권의 이 대사에 대한 공수처 조사 촉구가 실체 규명보다는 악화된 여론을 달래기 위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 공수처는 원칙적인 입장이다. 공수처 관계자는 지난 19일 정례브리핑에서 “소환 일정 조율에 대해선 말씀드리기 어렵다”며 “소환 일정은 수사팀이 제반 수사진행 상황 등을 고려하면서 사건관계인과 협의해서 결정할 것”이라는 말했다.

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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