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안전지킴이 경찰 ‘정신건강’ 빨간불

2024-04-05 13:00:53 게재

직무 스트레스·트라우마에 우울한 현장 경찰관 해마다 증가

경찰청, 지원시설·상담인력 확대 추진 … 예산 확보가 관건

“부패가 심한 사체를 처리한 경험이 계속 떠올라 힘들다. 잘 지내왔는데 갑자기 당황스럽고 내가 이상해 진 게 아닌지 불안하다.” “살인 사건 현장 목격 후에 밤에 식은땀을 흘리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 악몽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 경찰관들의 트라우마 호소 내용.

강도 높은 직무수행 과정에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겪는 우울한 현장 경찰관이 증가하고 있다. 경찰도 맞춤형 프로그램을 개발, 일선 경찰관들에게 제공하지만 예산과 인력 부족 등 넘어야할 산이 많다.

5일 경찰청 등에 따르면 충격적 사건·사고 현장이나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은 경찰관들은 업무 특성상 정신적 손상 위험이 크다. 악성 민원과 소송 등으로 인한 직무 스트레스도 타 직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우울증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치료를 받는 경찰관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석계역 인근 13중 추돌사고 현장에 출동한 과학수사 담당 경찰관이 사고 원인 등을 조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대연 기자

◆우울증·PTSD 치료 경찰관 증가 =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이성만 의원(무소속)이 지난해 국정감사 기간 경찰청과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우울증 진료를 받고 있는 경찰공무원이 2020년 1104명에서 2021년 1471명, 2022년 1844명으로 3년 동안 67%나 늘었다.

PTSD 치료를 받는 경찰관은 2020년 46명, 2021년 57명, 2022년 67명으로 46% 증가했다. 정신질환은 없으나 병원에서 상담 등을 받은 보건일반상담은 2020년 219명, 2021년 250명, 2022년 311명으로 42% 늘었다.

더 큰 문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찰관이 매년 20명이 넘는다는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찰관은 2020년 24명, 2021년 24명, 2022년 21명, 2023년 24명이었다.

실제로 지난 1월에도 한 파출소에 근무하던 A 경위가 직원휴게실에서 38구경 권총으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 당시 파출소에서 같이 근무 중이던 순경이 권총 소리를 듣고 119에 신고했으나, A 경위는 병원에서 끝내 숨졌다.

고인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 휴게실에서 쉬고 오겠다”고 한 뒤 파출소 내 직원휴게실에 혼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경찰서 간 인사교류를 앞두고 고민을 많이 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설·인력부족에 한계 = 현재 경찰청은 마음동행센터와 맞춤형 프로그램을 확대해 현장 경찰관 치유를 지원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란 지적이 경찰 안팎에서 나온다.

마음동행센터는 사건사고와 악성 민원 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경찰관들이 겪는 스트레스나 PTSD, 트라우마 등 정신적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시설이다. 심리 상담을 위주로 하며 병원과 연계돼 있어 치료가 필요한 경우 이를 지원한다.

마음동행센터는 2014년 서울·부산·광주·대전경찰청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문을 열었다. 현재는 세종시를 제외하고 전국 시도별로 1곳, 서울에는 2곳 등 18곳을 운영한다.

마음동행센터를 이용하는 경찰관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경찰청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마음동행센터를 이용한 경찰관은 1만8962명이었다. 이용자는 2019년 6183명, 2020년 8961명, 2021년 9940명, 2022년 1만4218명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최근 5년 사이에 3배 넘게 늘어난 것이다.

상담건수도 2019년 1만3245건, 2020년 1만7487건, 2021년 2만1881건, 2022년 2만5974건, 2023년 3만8199건으로 증가했다. 상담건수도 지난 5년 사이에 3배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일선에서는 수요에 비해 시설이 부족하다보니 마음동행센터를 찾는데 어려움이 크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전국 18곳 마음동행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상담인력은 36명에 불과하다.

일부 동행센터의 경우 상담을 민간에게 위탁하기도 하지만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상담을 위해서는 내부 인력 확보가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영식 서원대 교수(경찰행정학부)는 “외부에선 정신건강 문제가 경찰의 일이냐고 생각할 수 있다”면서 “하지만 경찰관들은 총기를 사용하는 직군이고 시민들을 상대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상담과 치료가 적극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는 경찰관 개인적으로 알아서 할 문제가 아니라 조직 내에서 구성원 관리 차원에서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국회 차원 노력 필요 = 나름 노력을 하고 있지만 날로 상황이 악화되면서 경찰 지휘부의 고민도 크다. 경찰은 우선 시설과 상담인력 확충에 온 힘을 다하고 있다.

경찰은 현재 18곳인 마음동행센터를 해마다 늘려 2028년까지 36곳을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경찰은 우선 내년에 센터가 없는 세종시를 비롯해 경기남부, 강원, 경남 등에 5곳을 설치할 계획이다.

상담인력도 2025년 33명, 2026년 15명, 2027년 15명, 2028년 9명을 충원해 현재 36명에서 108명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문제는 예산과 정원이다. 예산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다 보니 내년에 개소할 목표인 5곳의 경우도 지난해부터 추진했지만 속도가 나지 않고 있다.

경찰관 정신건강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되며 국정감사의 단골 주제였다. 체력이나 정신력 측정 결과를 선발과정에 반영하는 경찰공무원의 자살률이 일반 공무원과 비교해 훨씬 높기 때문이다. 문제가 제기될 때 마다 경찰은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예산과 정원 앞에선 무기력했다. 예산당국 나아가 정부와 국회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한국경찰연구에 실린 ‘경찰공무원의 자살 현황 및 예방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연구진은 “경찰관 심리 지원 과정에서 만나는 전문(민간) 상담사는 경찰 업무 특수성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며 “경찰 생활을 잘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전문 상담사를 양성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현직 경찰관이면서 이 문제를 연구하는 이만석 전북경찰청 감찰계장은 “직무스트레스가 소진(번 아웃)으로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장기적으로 경찰관에게 충분한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를 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단기적으로는 마음동행센터를 더 많이 활용할 수 있도록 시설과 상담 인력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광역 단위로 상담사 1~2명이 상주하는 현재 수준으로는 교대근무를 하는 일선 경찰이 꾸준히 이용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경찰관의 복지와 자살예방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전·현직 동료들을 대상으로 일정한 교육을 통해 동료상담사를 구성해 자살을 예방하고, 경찰관의 생애주기형 상담과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장기재직자들의 정신건강을 돌보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세풍 오승완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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