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소장 개인 빨래도 했는데 괴롭힘 아니라니”

2024-04-22 13:00:02 게재

직장갑질119, 공동주택 노동자 상담 사례 공개

“단기계약 근절·용역회사 변경시 고용승계 필요”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이 관리소장의 갑질을 못 견디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400여일이 지났지만, 아파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지난해 1월 1일부터 올해 4월 15일까지 들어온 이메일 상담 요청 중 아파트 등 시설에서 일하는 경비, 보안, 시설관리,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상담은 47건이라고 21일 밝혔다.

상담자들이 괴롭힘 가해자로 지목한 사람은 주로 관리소장, 입주민, 용역회사 직원들이었다.

한 노동자는 “관리소장의 부당한 업무지시와 사적인 빨래 지시가 너무하다는 생각에 분리 조치를 요구했으나 진전이 없어 노동청에 진정했다”며 “증거를 제출했는데도 괴롭힘을 인정받지 못하고 사건이 종결됐고, 이후 회사는 계약만료를 통보했다”고 호소했다.

카카오톡으로 문의한 한 아파트 경비 노동자는 “안내를 제대로 못 한다고 동대표 감사가 수시로 욕설하는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라면서 “근로계약서가 2개월짜리인데, 아무 문제 없는 건가요?”라고도 물었다.

2019년 발간된 ‘전국 아파트 경비노동자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 94%가 1년 이하의 단기 계약을 맺고 있었으며, 3개월 계약도 21.7%에 달했다. 이 사례처럼 초단기 계약을 맺고 있는 경비원이 입주민과 갈등을 빚으면 근로계약이 갱신되지 않는 일도 잦다.

현행 공동주택관리법은 입주자, 입주자대표회의 및 관리주체 등이 경비원 노동자 등 공동주택 종사자들에게 관계 법령에 위반되는 지시를 하거나, 부당한 명령을 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업무 이외의 부당한 지시나 명령을 금지한다는 모호한 표현만 믿고 ‘계약 연장이라는 밥줄을 쥔’ 입주민이나 관리소장에게 문제 제기를 할 공동주택 노동자는 없다는 것이 직장갑질119의 설명이다.

이메일로 상담한 한 여성미화원은 “미화반장이 뒤에서 끌어안거나 손을 잡는 등 성추행을 수십차례 했다”며 “저는 가해자 뺨을 치며 격렬히 거부하고 이 사실을 본사에 알리기도 했으나 ‘알려지면 여사님도 좋을 것 없다’며 가해자도 해고할 테니 저도 퇴사하라는 요구가 왔다”고 호소했다.

경비노동자에 대한 괴롭힘 문제는 ‘원청 갑질’의 문제와도 닿아 있었다. 경비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한 용역회사의 경우, 관리소장이나 입주민에 대해서는 ‘을’의 위치이기 때문에 ‘갑’의 의사에 반해 경비노동자를 보호하고 나설 가능성은 낮다.

노동계는 공동주택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초단기 계약부터 근절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재의 초단기 계약은 위탁관리업체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서 경비노동자를 쉽게 쓰고 버리기 위한 계약이라는 것이 노동계 주장이다.

이와 함께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적용대상을 입주민, 원청회사 등 특수관계인으로 확대해야 할 필요도 있다고 지적한다.

직장갑질119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2월 2일부터 13일까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괴롭힘 경험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305명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괴롭힘 피해자 10명 중 1명(10.1%)은 고객이나 민원인, 원청업체 관리 또는 직원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득균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다단계 용역계약 구조에서 경비노동자들은 갑질에 쉽게 노출된다”며 “공동주택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갑질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근로기준법 내 직장내 괴롭힘의 범위를 확대하고, 단기 계약 근절·용역회사 변경 시 고용승계 의무화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 14일 서울 강남 한 아파트 경비노동자 박 모씨가 관리소장 갑질을 호소한 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씨 사망 이후 직장 동료였던 경비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가해자로 지목된 관리소장의 사과와 해임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파트는 같은 해 12월 31일 경비노동자 76명 중 44명에게 계약만료를 통보했다.

노조는 아파트측의 일방적인 해고 통보에 맞서 지난 1월 10일부터 복직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장세풍·한남진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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