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미·중에 뒤처져”…프랑스 위기 강조

2024-05-03 13:00:03 게재

국가별 기업지원금 부활 등 제안 … ‘프랑스기업 살리기 아니냐’는 곱잖은 시선도

프랑스가 ‘유럽이 미국, 중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위기감을 고조시키며 해결방안 모색에 적극 나서고 있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AP=연합뉴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사진) 대통령은 “유럽이 임박한 위험에 직면해 있다”며 “모든 것이 매우 빠르게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와의 인터뷰에서 “유럽이 신재생에너지와 인공지능(AI), 양자컴퓨팅 등에서 미국과 중국에 뒤처지면서 산업격차가 놀랍게 벌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중국에게 국제무역의 규칙을 따르도록 만드는 시도를 중단했다. 오히려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자국 핵심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중국처럼 되고 있다”며 “유럽이 지금 대응하지 않으면 결코 미국과 중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이 미국과 중국의 보조금과 산업보호에 상응하는 조치는 물론 △연구개발 지출 2배 상향 △산업규제 대폭 완화 △자본시장 자유화 △유럽인들의 리스크 회피 타파 등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미국-유럽 생활수준 격차 커져”

프랑스 유력일간 르몽드는 지난달 30일 ‘유럽은 더이상 미국을 감당할 수 없다’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과 유럽의 생활수준 격차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임기 말 글로벌 금융위기의 후유증을 극복한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와 조 바이든 대통령을 거치면서 19세기 후반 기업들의 황금기인 ‘대호황시대(Golded Age)’, 1920년대 ‘포효하는 20년대(Roaring Twenties)’를 연상시키는 경제 가속화를 이뤄냈다”고 전했다.

르몽드에 따르면 미국기업들의 성과를 보여주는 수치는 어지러울 정도다. 시가총액 3조달러의 마이크로소프트(MS)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애플의 수익 940억달러, MS 720억달러, 알파벳 610억달러, 엑손모빌·JP모간 550억달러, 메타 400억달러 등도 유럽기업으로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인상적이다.

게다가 미국인들은 점점 더 부유해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16년 프랑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만8350달러, 미국은 5만8180달러로 약 50%의 격차를 보였다. 하지만 지난해 이 수치는 4만7360달러(프랑스)와 8만5370달러(미국)로 격차는 80%로 벌어졌다.

르몽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인용해 “2022년 구매력평가지수(PPP)를 고려한 미국인 평균연봉은 7만7000달러인 반면, 프랑스인 평균연봉은 5만2700달러였다”며 “PPP 기준에서도 미국과 프랑스의 격차는 2016년 30%에서 40%로 늘어났다”고 지적했다.

10년 전 유럽연합(EU, 영국 포함)의 GDP는 세계 경제의 23.5%를 차지해 미국 비중(22.1%)보다 높았다. 하지만 그 비중이 역전돼 올해 현재 미국경제 비중은 26.3%, 영국을 포함한 유럽은 20.5%다.

스페이스X의 우주탐사, 테슬라의 전기자동차, 바람과 태양을 이용한 텍사스의 재생에너지 등 미국은 여러 산업분야에서 재부상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풍부한 에너지를 배경으로 한다고 르몽드는 분석했다. 미국은 수년 전부터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더 많은 석유를 생산하고 있으며, 천연가스를 통해 지난 20년 동안 전력 생산원 중 석탄 비중을 50%에서 20%로 줄이는 등 최고의 CO₂ 감축 기록을 세웠다.

“유럽, 글로벌 제조경쟁서 입지 약화”

이런 가운데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일 “비싼 에너지와 높은 이자율, 빈약한 내수수요로 인해 산업혁명의 요람이었던 유럽이 부유한 미국과 중국 관광객을 위한 박물관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했다”며 “유럽 경제의 근간인 제조업은 미래산업을 구축하기 위한 글로벌 경쟁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중국 전기차 회사들은 저렴한 제품을 유럽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동차 등 첨단 제품에 필수적인 반도체 생산에서 유럽은 미국이나 중국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배터리 생산 측면에서 중국이 크게 앞서나가는 가운데 미국도 2030년이면 유럽의 배터리 생산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수년 동안 중국의 대규모 국가 지원 제조업체들이 가치사슬을 빠르게 상승시키며 유럽의 첨단 엔지니어링 및 자동차 기업을 위협하고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08년 24%였던 EU의 세계 제조업 점유율은 2022년 약 16%로 줄어들었다. 반면 중국 점유율은 같은 기간 14%에서 31%로 증가했다.

동시에 청정에너지 제조업에 투자해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은 2032년까지 1조2000억달러에 달하는 보조금을 내걸었다. 이는 EU 제조기업들의 연간 순생산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막대한 규모로, 유럽 등 글로벌 기업들을 미국시장으로 유인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1만2000명의 직원을 둔 스위스 정밀공구 제조사‘올리콘’은 지난해 12월 독일공장을 폐쇄하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헌터스빌로 생산시설을 이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회사 CEO 마이클 슈스는 “유럽은 세계에서 생산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지역 중 하나”라며 “우리 같은 기업들의 반응은 최상의 생산조건을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2022년 100억유로를 투자해 중국에 최첨단 공장을 짓겠다고 밝힌 독일의 글로벌 화학기업 바스프도 지난해 독일을 비롯한 유럽 생산시설에서 2600개의 일자리를 감축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OECD 데이터에 따르면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의 순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출액은 2023년 상반기 820억달러로 2년 전 530억달러에서 크게 늘었다.

WSJ는 “생산량 확대가 시급한 유럽은 이전과 다른 급진적 조치를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바로 국가보조금을 전격 부활시키자는 것이다.

프랑스텔레콤 최고경영자와 프랑스정부 재무장관을 지낸 티에리 브르통 EU 내수시장 집행위원은 올해 초 유럽 군수장비의 약 2/3를 생산·수출하는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1000억유로의 공공기금을 조성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파격적 제안이다. EU는 지난 수십년 동안 개별기업에 대한 국가 지원을 제한하기 위해 유럽 각국 정부와 싸워왔기 때문이다.

브르통 집행위원이 제안한 방위산업에 대한 대규모 자금 지원은 아직 논의중이다. 하지만 지난 3월 EU는 더 많은 방산장비를 유럽 내에서 구매하기 위해 15억유로의 지원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마크롱 대통령의 측근이기도 한 브르통 집행위원은 “이제 우리의 운명은 우리 손에 맡겨야 한다”며 “생산능력을 더 많이 늘리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강조했다.

독일 등은 프랑스 제안에 반대

프랑스 대통령과 고위 정치인이 목소리를 높이는 데 대해 곱지않은 시선도 존재한다. 프랑스가 자국기업들을 챔피언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유럽 전체의 이익을 내거는 것 아니냐는 시선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마크롱 대통령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스가 자국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의 경제·산업적 공습을 강조하는 게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WSJ는 “브르통 집행위원의 1000억유로 방산기금 아이디어는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거센 반대에 직면했다”며 “또 브르통 집행위원이 과거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에 대응하기 위해 EU가 공동차입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소버린펀드’를 제안한 것에 대해서도 회원국들의 반대로 현재 뒷전으로 밀려난 상태”라고 전했다.

WSJ에 따르면 프랑스에 반대하는 측의 입장은 ‘유럽이 자생력이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프로젝트나 산업부문에 수십억유로의 세금을 낭비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유럽의 사회복지모델을 더욱 약화시키고 유럽인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최대 수출품 중 하나인 자동차산업은 반도체 및 배터리 등 다른 주요 산업분야와 얽혀 있다. 반도체와 배터리 모두 보조금 지급의 초점이 되는 분야다.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제이콥 커케가드는 “유럽의 일부 자동차산업을 살리는 데 이득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어떤 대가를 치르느냐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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