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월가 기준유가 독점에 '도전장'

2016-01-18 11:12:19 게재

유럽·중국에 루블화 표시 원유수출 준비 … 중국도 내년초 위안화 표시 원유거래 전망

러시아가 국제유가를 좌지우지하는 월가의 유가독점시대를 깨뜨릴 비장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미국의 원로 경제전문가 윌리엄 엥달이 전망했다.

엥달은 최근 뉴이스턴아웃룩 기고문에서 "모든 국제원유 거래가 미국 달러로 이뤄지는 '석유달러'(petro-dollar) 국제유가 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가 야심찬 준비를 하고 있다"며 "유럽과 중국 등에 수출하는 원유를 자국통화인 루블화로 결제하는 시스템을 마련중"이라고 전했다.
러시아상품거래소(SPIMEX) 홈페이지 초기화면. 러시아는 달러로만 거래되는 국제원유시장에서 탈피해 자국통화 루블화로 결제하는 기준유가 시스템을 시범운영중이다. 시범운용기간을 마치면 유럽과 중국 등에 수출하는 원유를 루블화로 판매할 방침이다.


엥달은 '전방위 지배'와 '파괴의 씨앗 GMO',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타깃 차이나' 등 저서로 국내에도 친숙한 전략경제학자로, 미국의 정치경제적 패권주의를 비판해온 인물이다.

지난해 11월 러시아 에너지부는 달러가 아닌 루블화로 표시되는 새로운 기준유가를 신설해 시범거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대다수 국가들에겐 대수롭지않게 들렸지만, 이는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

엥달은 "러시아의 시도가 성공한다면 러시아 선물원유 기준가격 계약은 루블화 환율로 이뤄지게 된다"며 "러시아와 중국, 기타 국가들의 달러패권 도전이 물밑에서 은밀히 시작됐다"고 말했다.

엥달에 따르면 국제 기준유가를 설정하는 일은 미국 월가의 대형은행들이 유가를 통제하는 핵심전략이다. 석유는 달러로만 거래되는 세계 최대 원자재다. 현재 러시아 원유가격은 영국 북해산 브렌트유 가격에 연동돼 있다.

그는 "국제유가 설정의 문제점은 브렌트유 생산량이 급감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 그리고 브렌트유 계약이 월가은행들의 파생상품 거래로 통제된다는 점"이라며 "대표적인 유가통제 은행은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JP모건체이스, 씨티은행"이라고 지목했다.

석유달러시대의 퇴조 = 달러로 표시되는 원유 판매는 달러패권의 핵심이다. 중국과 일본 독일 등 전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국제무역을 위해 외환보유고에 달러를 넘치도록 담아두고 있다. 그 결과 달러는 전 세계 공용화폐처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패권의 한 축은 달러이고, 또 다른 한축은 군사력이다.

전 세계 모든 나라는 원유 등 원자재를 수입·수출하기 위해 달러를 사용해야 한다. 러시아나 중국 등의 나라들은 무역흑자로 벌어들인 달러로 미 국채 등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증권을 구입한다. 현재 달러를 대체할 유일한 대안은 유로화인데, 2010년 그리스 경제위기 이후 유로화 역시 위태위태한 상황이다.

1971년 8월 이후 미국 달러는 세계 통화의 권력을 갖게 됐다. 당시 미국은 금본위제를 파기했다. 이는 미국이 무한대의 예산적자를 편성할 수 있도록 도왔다. 엥달은 "한도가 없는 마이너스통장을 가졌지만 이를 갚을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유했다.

미 경제방송 CNBC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미 정부의 현재 부채수준은 18조6000억달러를 넘었다. 연간 연방세수의 600%에 육박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적자 비율은 111%다. 그럼에도 미 정부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는다. 달러패권이 있기 때문이다.

200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취임할 당시 미 정부 채무는 GDP 대비 55% 수준이었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이 아프간과 이라크를 대상으로 '테러와의 전쟁'에 나서면서 정부 적자는 빠르게 늘었다. 하지만 미 정부는 '빚은 중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러시아와 중국 일본 인도 독일 등이 미국과의 무역흑자로 얻은 막대한 달러를 미 국채를 사는 데 쓰고 있기 때문이다.

엥달은 "달러를 유일 기축통화로 유지하는 일은 미국 정부와 월가의 최우선 목표"라며 "이 목표는 국제유가를 결정하는 방법과 본질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1980년대 말까지 국제유가는 매일매일의 수요 공급에 따라 정해졌다. 원유 구매자와 판매자의 영역이었던 것.

하지만 골드만삭스는 월가의 소규모 원자재중개업체인 아론사(J. Aron)를 사들이면서 원유거래시장에서 통용되는 게임의 법칙을 바꿨다. 바로 원유 선물의 시대가 도래한 것. 원유를 실제 주고받는 것과 무관하게 계약서로만 존재하는 '장부상 원유'(paper oil)가 탄생했다.

파생상품시장을 통해 소수의 대형은행들이 국제유가를 좌우할 수 있게 됐다. 월가의 대형은행들은 원유선물 거래를 장악하게 됐고, 누가 매도·매수 포지션을 취했는지 알게 됐다. 엥달은 "석유거래시장이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JP모건체이스 등 소수의 월가 대형은행들이 운영하는 도박장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고 비판했다.

달러 표시 원유거래의 시작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동전쟁 여파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판매하는 원유가격이 약 400% 치솟았다. 미국 재무부는 고위급 사절단을 사우디에 긴급 파견했다.

1975년 미 재무부 차관보 잭 베넷은 사우디와 협정을 맺어 '석유거래에 일본 엔화나 독일 마르크 등의 통화가 아닌, 오직 달러만 사용할 것"을 확인했다. 베넷은 협정 직후 다국적 석유기업인 엑슨의 고위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우디는 그 대가로 미국의 안보방위와 군수물자 제공을 약속 받았다.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국제원유 거래는 미 달러로만 결제되고 있다.

또 월가의 대형은행들은 영국 런던 소재 선물거래소(ICE)나 미국 뉴욕상품거래소(NYMEX), 두바이상품거래소에서 파생상품과 원유선물 등을 통제하면서 중동산 원유가격을 좌우한다. 국제시장의 모든 원유는 골드만삭스와 JP모건체이스, 씨티그룹 등 유대가 긴밀한 소수 월가은행들의 손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당시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석유를 통제할 수 있다면 모든 나라를 통제할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945년 이래 국제 달러시스템의 핵심 요소는 바로 석유였다.

러시아 기준유가 체제의 의미 = 현재 러시아 수출원유 가격은 영국 런던과 미 뉴욕에서 브렌트유가 기준에 따라 정해진다.

하지만 러시아의 입장 변화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루블화 표시 러시아산 원유가 러시아상품거래소(SPIMEX)에서 거래될 전망이기 때문이다.

브렌트 기준유가는 전 세계에서 거래되는 원유 총량의 2/3에 적용되고 있다. 문제는 북해산 브렌트유의 생산이 급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루 100만배럴 생산에 그치는 브렌트유의 가격이 전 세계 원유거래의 67%를 좌우하고 있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 원유생산국이다. 따라서 러시아 원유가 루블화로 거래된다면 그 의미는 적지 않다는 게 엥달의 관점이다. 2013년 기준 러시아는 하루 1050만배럴을 생산했다. 사우디를 근소한 차이로 앞섰다. 천연가스는 주로 러시아에서 생산되는데, 최대 75%를 수출할 수 있다. 유럽은 러시아 원유의 주 소비자다. 하루 350만배럴, 러시아 총 수출원유의 80%를 유럽이 가져간다. 우랄혼합유는 러시아의 주요 수출품종으로, 주 수입국은 독일과 네덜란드 폴란드 등이다.

유럽에 원유를 수출하는 산유국은 사우디(수출량 하루 89만배럴)와 나이지리아(81만배럴) 카자흐스탄(58만배럴) 리비아(56만배럴) 등인데, 러시아와 비교하면 수출량이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러시아 루블화 표시 기준유가의 의미는 상상 이상일 수 있다. 유럽 내 원유생산량은 2013년 하루 평균 300만배럴에 그친다. 북해산 브렌트유와 함께 생산량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루블화 표시 원유수출은 서유럽은 물론 동시베리아 송유관(ESPO)을 통해 원유를 수입하는 중국과 아시아국가에도 적용될 전망이다. 석유달러 의존도를 줄이려는 노력은 비단 러시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세계 2위 원유수입국인 중국도 이르면 내년 상반기 위안화 표시 기준유가를 신설할 방침이다. 위안화 표시 원유는 상하이에너지거래소에서 거래된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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