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트라우마, 사회적 치유 필요하다 │① 트라우마 악화일로 걸은 3년

무덤 속에서 사는 기분 … ‘이제 좀 나아질까’ 희망.불안 엇갈려

2017-08-10 00:00:01 게재

유가족 6명의 이야기 … “대정부 투쟁 멈추자 아이 빈 자리 더 느껴”

새정부가 진상규명해주겠지 하면서도 조바심 … 육체적 고통 심해

3년은 소위 ‘탈상’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3년 4개월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는 ‘탈상’은커녕 참사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존자나 유가족은 물론이고 국민들에게도 세월호는 여전히 집단적 트라우마입니다. 그런 면에서 참사 이후 3년은 ‘세월호 트라우마’를 악화시키는 시간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약속한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세월호 트라우마의 사회적 치유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사회적 치유의 시작은 공감과 존중입니다. 피해자들의 더욱 깊어져 가는 고통에, 참사의 제대로 된 마무리가 얼마나 우리 사회에 중요한 것인지에 공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트라우마를 악화시키기만 했던 우리 사회에 대한 반성과 개선도 필요합니다. <편집자 주>

“집에서 나오면 다 아이가 걷던 길이고, 지나쳤던 가게들이에요. 아직도 그게 참 힘들고 무덤 속에 집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성호 엄마 정혜숙씨)

“내가 괴물이 된 것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하면 힘들겠구나 공감하는 게 아니라 그래 당신들도 겪어봐야 알지 생각해요. 희로애락이 없고 모든 일에 그저 담담해요.”(재욱 엄마 홍영미씨)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지만 세월호 유가족에겐 그 말이 적용되지 않는 듯했다. 7월 한 달 동안 만난 6명의 안산 단원고 희생자의 부모들은 아이의 죽음을 처음 알았을 때처럼 처절한 비명을 지르거나 창자가 끊어지는 통곡을 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아팠다. 어떤 아버지는 3년 전보다 더 힘든 느낌이 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내 아이가 왜 죽었는지 알려 달라며 3년여를 숨가쁘게 달릴 때는 그나마 아이 생각이 덜 나고 덜 힘들었는데 문득 멈춰 선 지금 몸과 마음의 고통을 느낀다고 말한다. 삶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 자의 정신적 외상,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트라우마를 유가족들은 이제서야 마주하고 있다.

분노의 힘으로 버틴 3년 = “우리에겐 시간이 약이 아니었어요. 투쟁이 약이었지. 왜 국가가 피해자를 보호해 주지 않지? 왜 우리를 싸움꾼으로 몰고 원숭이처럼 손가락질하고 그러지? 의아함과 분노로 무기력해지려는 몸을 이끌고 억지로 한발한발 나서서 싸웠잖아요. 그러지 않았으면 이런 말하기 참 그렇지만 가족들 자살률이 많이 높았을 거예요. 지난 정부가 해 준 게 있다면 우리를 너무 짓밟아서 분노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우리를 죽지 않게 했다는 거예요. 역설적이지만.”(홍)

‘분노의 힘으로 버텼다’는 이야기는 세월호 인양과 진상규명의 싸움에 전면에 서 있던 유가족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나라가 어떻게든 해 줄 거라고 믿었지만 진도체육관에 가서 본 아비규환, 현장책임자 나오라고 했더니 파출소장이 나왔을 때 느낀 황당함, 어찌어찌 배를 구해 사고 현장으로 가 보니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다던 구조활동은커녕 적막하기만 했던 밤바다, 나라가 잘못하면 잘못을 지적하고 제대로 보도해 줄 거라는 상식과 정반대였던 언론보도, 분명 피해자 가족은 아닌 듯한데 근처를 얼쩡거리며 가족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어디엔가 보고하던 예리한 눈매의 남자들. 그 즈음의 기억은 통틀어 ‘국가에 대한 분노’라는 한 단어로 집약된다.

“나라는 피해자를 보호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맨 앞에 서서 싸워야 하고, 특별법 만들어 달라고 전국을 돌아다니고, 청운동으로 국회로 다니며 울고 매달리고…. 피해자는 가만히 있어도 보호받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우리가 나쁜 사람이 되고, 우리가 나서서 울지 않고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를 위해 움직여 주지 않는, 피해자가 투사가 되어 모든 것을 싸워서 얻어내야 하는 그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건우 엄마 김미나씨)

달리다 문득 멈춰 서다 = 금요일에 돌아올 줄 알았던 아이들을 그렇게 황망하게, 한편으론 분노 속에서 보내고 가족들은 바로 투쟁의 시간으로 빨려 들었다.

정혜숙씨는 일주일 만에 나온 성호의 장례를 치른 후 다시 진도로 내려갔다.

“4월 23일 성호 시신이 나왔어요. 134번(시신이 나온 순서)이라는 기막힌 꼬리표를 달고 안산으로 돌아왔어요. 장례 치르고 5월초부터 팽목에 가 있었어요. 부모들 위로하고 잠수부 식사준비하고. 같은 마음의 부모들인데 나는 아이라도 찾았지만 아직 기다리는 분들은 너무 고통스럽잖아요. 우리 반 아이들 오는 것까지 다 보고 올라왔어요. 그러고는 안산 분향소에서 특별법 서명 받고, 전국 다니고, 농성하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죠.”

너만 잘하면 되니 나서지 말라고 아이에게 말하곤 했던 호성이 엄마 정부자씨도 어느샌가 세월호 진상규명 시위의 앞대열에 서 있었다.

“졸업하고 좋은 대학가고 잘 살면 된다고 그게 부모역할이라 생각했는데, 내 아이가 이렇게 비참한 일을 겪다니. 밤만 되면 나도 모르게 답답하니까 밖을 돌아다녔어요. 초등학교 그네에 앉아 있고 중학교도 가보고 어느새 단원고 앞에 가서 울고 있어요. 그러다 4.16가족협의회 일정대로 움직이기 시작해서 광화문 처음 가보고, 국회도 청운동도 다 처음 가봤어요. 국가가 당연히 진상규명을 해야지 왜 우리가 소리를 쳐야 되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불러주는 곳에는 다 가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냥 아이 이름 부르면서 울기만 한 적도 있어요.”

그렇게 투쟁의 3년이 지나가고 유가족들은 문득 멈춰 섰다. 세월호 인양과 미수습자 수습 과정의 모니터링, 세월호 국민조사위원회, 2기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설립을 위한 활동 등은 여전히 바쁘지만 정권교체 이전만큼은 아니다.

“아이 못 지킨 죄인이니 더 아파야 돼” = 멈춰 서니 그동안 외면했던 몸과 마음의 고장이 피할 새도 없이 인지됐다. 3년 동안 유가족들은 자기 몸이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방치했다. 죽어간 아이의 고통에 비하면 내가 겪는 이 정도 아픔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마음에 알게 모르게 스스로를 학대한 것이다.

“아이한테 미안해서 아파도 치료 안 받았어요. 이건 아픈 게 아냐, 나는 더 아파야 돼, 아이 못 지킨 죄인이니 더 아파야 돼 이러면서 나를 혹사한 것 같아요.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다리가 아파 목발 짚고 다니면 마음이 더 편했어요. 집에 들어가면 할 일을 하고 왔다는 마음에 아이 사진 보면서 불편함도 적고. 요즘 들었는데 간수치가 많이 올라가서 위험한 상태라고 해요. 추운 데서 많이 자서 그런가.”(정부자)

“진도체육관에 있을 때 5일만에 혈압이 230까지 가서 그때부터 혈압약을 먹었어요. 마른 체형이라 혈압이란 걸 모르고 살았는데 분노와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아요. 이후에 투쟁하면서 밥 안 먹고 다니고, 제대로 씻지도 않고, 길바닥에서 자고 하다 보니까 몸이 많이 망가졌어요. 2016년 가을에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신장병이 심해졌다고 해요. 관절에 물이 차서 정기적으로 빼러 가요. 병원에서는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고 하고요.”(정혜숙)

심리적으로도 여러 종류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세희 아빠 임종호씨는 요즘 들어 심리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고 했다.

“초기에 온마음센터에서 방문해 도와주려 했는데 너무 싫었어요. 그런데 지금이 오히려 필요한 시기인 것 같기도 해요. 항상 머리 속에 진상규명을 해서 책임자처벌을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직장동료들과 평범한 대화가 안 돼요. 놀러 갈 계획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런 상황이 아니니까. 하루에 3시간을 운동해요. 몸이 피곤해야 약을 안 먹고 잘 수 있으니까.”

예은이 엄마 박은희씨와 정부자씨는 아이의 시신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3년 전을 되뇌이며 후회하곤 한다.

“호성이는 자루에 감싸여 있었어요. 목에 큰 상처가 나 있었어요. 맞네 호성이 하며 손을 내미는데 내 몸은 뒷걸음질치고 있었어요. 통곡이 나오고 숨이 막혔어요. 순간적으로 아이가 관에 들어갔고 그 다음에는 보지 못했어요.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시신 상태가) 많이 망가져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얼굴은 못보더라도 마지막 가는 길에 꼬옥 한번 껴안아 줬어야 했는데 …”

“예은이의 쌍둥이 언니가 거의 발작하다시피 힘들어 해서 돌보느라 진도에 내려가지 못했어요. 안산에서 계속 전화하고 카톡하는게 다였는데 그때 예은이에게 갔어야 했는데 그게 제일 후회돼요.”

새로운 시작, 그러나 불안하다 = 유가족들은 피해자가 된 후 처음으로 국가가 뭔가 해 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불안한 마음은 거두지 못했다. 새 정부를 믿고 싶다는 마음과 3년 동안 뼈저리게 겪은 국가에 대한 불신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도 보였다.

“우리는 봤잖아요. 소위 관료들이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진상규명을 방해했는지. 정권이 바뀌어 위의 사람은 바뀌었지만 아래는 그대로잖아요. 우리가 하나하나 확인하지 않으면 제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그런 마음이 커요.”(홍)

“박근혜만 물러나면 진상규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시민사회에서도 정부가 바뀌었으니 기다려 봐라는 분위기에요. 그런데 뭔가 정체된 느낌이에요. 문재인정부가 잘 해줄거라는 희망은 갖고 있지만 그럼 우린 뭘 하지 하는 생각도 들고. 싸울 때는 아이의 빈자리 못 느꼈는데 지금은 자주 생각나요.”(임)

유가족들은 이제서야 자신을 돌아보고 트라우마를 마주보고 있지만 그들을 안아 줄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여전히 준비되지 않았다. 유가족과 안산 시민들의 트라우마치료를 위해 안산온마음센터가 건립돼 운영되고 있지만 센터와 유가족의 관계는 서걱거린다. 다시는 자신들같은 유가족을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안전사회 만들기를 외쳤고, 4.16안전공원 건립도 그런 취지에서 시작했지만 맨 앞에서 도와줘야 할 행정가들은 뒤에 빠져 있다.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후 정부 대응이 3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며 세월호 가족들은 또다른 죄책감에 시달린다.

세월호 참사는 진행중이다.

[관련기사]
[세월호 트라우마 3년] 유가족들, 사태수습 희망 속 심리불안
"치유 첫 단계는 국가 차원의 존중" … 세월호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세월호 트라우마, 사회적 치유 필요하다' 연재기사]
① 트라우마 악화일로 걸은 3년│ 무덤 속에서 사는 기분 … ‘이제 좀 나아질까’ 희망.불안 엇갈려 2017-08-10
② 부실한 공적 지원│ 1대1 심리상담 헛돌고 의료지원도 중단 2017-08-11
③ 전문가 인터뷰 - 채정호 서울성모병원 교수│ "의료만으로는 한계, 사회적 애도·존중 뒤따라야 치유 가능" 2017-08-16
④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집요하게, 정확하게, 끝까지 진상규명해야 치유된다" 2017-08-17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김형선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