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적 아픔 건드린 트럼프의 패착

2019-06-03 11:57:36 게재

케빈 러드 호주 전 총리, NYT에 "미국이 좋은 조건으로 무역협상 타결하기 어려워졌다"

싱가포르 최대 일간지 전 편집국장 "중국이 굴복할 것'이라 오해한 게 트럼프 최대 실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5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중국과의 무역협상이 무산됐다'는 글을 올렸다. 협상타결이 임박했다는 그간의 태도에서 180도 달라진 것이었다. 중국은 역사의 오버랩으로 술렁거렸다.

약 100년 전인 1919년 5월 4일 중국 베이징의 학생들은 반제·항일 운동을 벌였다. 1차 세계대전 말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천명한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중국 민중의 호응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독일이 점령하던 산둥지역을 동맹인 중국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미국은 말과는 달리 일본에 넘겼다. 중국에서 반미감정이 치솟았다. 그 결과물 중 하나는 중국 공산당 창당이었다.

시 주석은 최근 중국 장시성을 방문했다. 1934년 3월 '대장정'의 출발지다. 중국 공산당은 대장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간난고초를 겪었지만 결국 승리했다.

호주 총리를 지낸 케빈 러드는 지난달 30일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시진핑 주석에게 민족주의라는 강력한 팻감을 넘겨줬다"고 주장했다. 러드 전 총리는 현재 아시아를 전 세계에 알리는 비영리단체 '아시아소사이어티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러드 소장은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의 과거를 헤아릴 필요가 있다"며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유권자에게 강인한 이미지를 보이고자 했다면 그는 승리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기술이전 강제나 지적재산권 침해나 산업보조금 지급, 환율조작 등 중국의 무역정책을 바꾸고자 한 것이라면 그는 승리를 확신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글이 게시된 지 얼마 안돼 중국은 미국에 절대 양보할 수 없는 3가지 레드라인을 공표했다. 첫째 협상이 타결된 이후에는 관세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 둘째 미국만 단독으로 보복관세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 셋째 중국이 구매해야 하는 미국 상품 리스트를 계속 늘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레드라인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다. 그간 중국의 대미 협상팀은 지도부로부터 대단히 유연한 재량권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3가지 레드라인은 대중에 공표됐다. 중국 지도부가 이를 물릴 방법은 없다. 미국의 이해관계를 더 관철시키는 방향으로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은 크게 줄었다.

러드 소장은 "지난 몇주 동안 베이징에서 머무르며 보고 들은 것은 중국이 이전과는 정확히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경제 분석가들은 전면적인 무역전쟁의 충격이 중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약 1.2% 갉아먹을 것으로 추산한다. 중국 언론은 그 정도 타격은 전적으로 관리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재정·통화 부양책으로 국내 수요를 끌어올리면 6%대 경제성장률은 가뿐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한 가지 대목은 상당수 중국 지도부가 '미국과 꼭 협상을 타결해야 하는가' 묻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러드 소장은 "이들은 기술과 투자, 외교, 국가안보, 인권 등의 부문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에 적대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며 어차피 다음 수순이 신냉전 돌입이라면 지금 미국에 양보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묻고 있다"고 전했다. 즉 불필요하게 정치적 자본을 낭비하지 말고 다가올 중미 냉전을 대비하는 게 훨씬 낫다는 입장이라는 것.

러드 소장은 "트럼프 행정부가 이런 상황을 원했던 것이라면 미국의 전략은 대단히 성공적"이라며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대중 무역적자를 줄이고 중국의 그릇된 행동을 일부나마 고치는 등 무역협상 타결을 진심으로 원한 것이었다면 미국의 협상전략은 진지하게 재평가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공식 입장은 여전히 '협상은 지속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레드라인의 틀 내에서도 타결의 여지는 남아 있다. 미국이 현재의 관세를 철회하고 이후 관세를 독단적으로 부과하는 행동을 포기한다면, 중국은 미국 상품을 기존보다 많이 구매하는 데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이전보다 훨씬 더 줄었다.

러드 소장은 "트럼프의 미국뿐 아니라 시진핑의 중국도 민족주의 팻감을 보유하고 있다"며 "중국은 역사적 프리즘으로 현재와 미래를 보고 있다. 지난 100년간 대미 관계에서 중국은 스스로를 '약하다'고 인식했다. 오늘날 중국은 스스로를 더 이상 약한 나라로 인식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싱가포르 최대 일간지 '스트레이트타임스' 전 편집국장 레슬리 퐁도 2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기고에서 "트럼프의 최대 실수는 중국이 굴복할 것이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이라고 지적했다.

퐁 전 편집장은 "미국은 경제와 군사적 위협 등으로 중국을 굴복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다"며 "하지만 중미 대립이 심화될수록 중국 지도자는 물론 국민들도 강력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중국이 1~2세기 전 열강에 의한 굴욕을 집단의 기억으로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1차 아편전쟁(1839~1842)을 시작으로 중국의 국가적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다. 상하이 내 영국인 거류지의 한 공원 입구에는 '개와 중국인은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퐁 전 편집장은 "국가간 관계를 거래의 관점에서 보는 미국 정치인들은 국가적 자존심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며 "미국은 지난 수십년 동안 전 세계를 대상으로 '탄압하니 굴복하더라' 하는 기억을 갖고 있다. 그래서 중국 역시 굴복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 지도자들은 미국의 무역전쟁이 더 많은 콩이나 보잉비행기를 구매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며 "미국은 중국에게 강대국이 되려는 의지를 접고 최첨단 기술과 산업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중국은 이를 또 다른 이름의 식민지화로 간주한다"고 전했다.

중국 지도자들은 주권에 대한 미국의 전면 공격에 대해 끝장을 볼 때까지 대항할 전망이다. 그는 "중국은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미국의 주먹이 날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며 "중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을 겨냥해 정밀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산 대두 수입을 중단하거나 트럼프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미국 기업의 상품에 불매운동을 펼치거나 중국에 있는 미국 기업들을 겨냥하거나 희토류를 무기화하는 방법 등을 통해서다.

그는 "중국 지도부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며 "미국에 굴복하는 건 곧 공산당 일당지배가 와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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