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석유업계, 생명연장 위해 현실적 타협

2021-03-05 12:11:32 게재

탄소세 지지에 탄소포집 참여 ... 블룸버그 “기후정책 변화, 실제적이고 중대한 위협 간주”

2019년 11월 1일 미국 환경운동가들이 엑손모빌 재판이 열리는 뉴욕카운티법원 앞에서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내용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AFP=연합뉴스


지난 1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미국석유협회(API)가 조 바이든행정부가 고려중인 ‘탄소세’ 부과에 지지 입장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탄소세는 연료에 함유된 탄소함유량에 비례해 세를 부과하는 제도다. 미국 200개 이상 석유관련 기업을 회원사로 둔 화석연료 로비단체가 갑작스레 친환경적으로 변할 것을 예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나아가 오일메이저(글로벌 거대 석유회사)인 엑손모빌은 3일(현지시각) 탄소포집 신사업부를 창설했다고 밝혔다. 탄소포집은 화석연료 사용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모으는 기술이다. 이 기업 CEO 대런 우즈는 “전세계 정부가 탄소배출과 관련한 친환경 정책을 추진하며 탄소포집 사업의 전망이 좋아지고 있다. 현장에 도입할 만큼 발전했다”고 말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일까. 4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석유업계 관계자들은 “화석연료 기업들이 바이든행정부의 기후정책 변화를 실제적이고 중대한 위협으로 보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라고 입을 모았다.

배출거래제 형태든 지구온난화에 대한 세금이든 탄소배출에 가격을 매기겠다는 구상은 화석연료업계의 이해관계와 상충하기 마련이다. 기업들의 주력상품 가격이 비싸지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공공정책 교수인 조 앨디는 “오일메이저들은 바이든행정부가 추진할 친환경 정책이 자신들을 더 안좋은 상황으로 내몰 수 있다는 점을 걱정한다”고 말했다.

탄소세, 화석연료업계에 희망될 수도

블룸버그통신은 “하지만 탄소세 정책 자체는 화석연료업계에 일말의 희망이 될 수 있다”며 “시추 자체를 금지하는 규제, 또는 청정에너지 사용을 의무화하는 규제와는 결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탄소세 정책은 석유기업들이 천연가스를 뽑아내는 것을 막거나 화석연료를 국가전력망에서 배제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탄소세 정책은 또 탄소포집 등의 기술에 대한 투자를 이끌 수 있다. 이는 결국 전력생산의 원천으로서 화석연료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도 손해가 아니다. 온실가스 배출에 가격을 매기게 되면 천연가스보다 석탄이 더 불리하다. 탄소배출이 상대적으로 적은 천연가스는 발전의 직접 경쟁자인 석탄에 비해 경쟁우위를 가질 수 있다.

백악관 입법담당 부국장을 지낸 마이크 맥케나는 “오일메이저는 모두 적극적으로 보호하려고 하는 천연가스 자원을 갖고 있다. 탄소세는 오히려 천연가스를 보호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단 천연가스가 전력공급원으로서 경쟁한다면 석탄의 도태는 시간문제”라고 덧붙였다.

탄소세는 경제학자들이 선호하는 정책도구였다.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단순하고도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비용을 가솔린과 시멘트 등 과도한 탄소배출 제품에 직접 전가할 수 있다.

미국의 UN기후변화 특사인 존 케리는 지난해 11월 정치전문지 ‘더 힐’ 기고에서 “우리 모두는 온난화가스 배출로 대가를 치르고 있다”며 “그러나 탄소세는 탄소를 배출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책임을 지운다. 기업들과 소비자 모두에게 탄소배출을 줄이도록 촉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바이든행정부의 재무장관이자 연방준비제도 전임 의장이었던 재닛 옐런은 과거 “탄소세는 기후변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교과서적인 해법”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전력기업 ‘엑셀론’과 태양광기업 ‘퍼스트솔라’ 등 수십곳의 기업들도 탄소배출에 세금을 매기고 그 세수를 소비자들에게 쓴다는 계획을 지지한다. ‘미 상공회의소’와 미국 200대 대기업 협의체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 역시 탄소세에 대해 기본적으로 찬성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관련 정책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민주당의 장담에 이끌렸다.

환경단체들, 석유기업들 꿍꿍이 의심

하지만 환경론자들은 회의적인 입장이다. 이들은 화석연료 기업들의 탄소세 지지에 함정이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탄소세를 시행하는 조건으로 환경 관련 규제완화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비영리로 운영되는 자발적인 과학자 단체인 ‘참여과학자모임’의 케이시 멀베이 국장은 “미국석유협회는 기후변화에 대한 허위정보를 퍼뜨려왔다. 기후변화 이슈의 신뢰성을 무너뜨리려고 갖은 애를 썼다”고 비판했다.

미국석유협회는 1998년 언론 캠페인을 주도했다. 기후변화론이 과학적 확실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미국 청정에너지 및 2009 안보법으로 알려진 ‘왁스맨-마키법안’을 막기 위해 각종 로비를 펼쳤다. 탄소거래제와 관련된 이 법안은 미국석유협회가 의회에 압력을 넣어 결국 2010년 상원에서 부결됐다. 멀베이 국장은 “미국석유협회는 기후변화 대처를 저지하고 기후위기를 악화시킨 수십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환경적 측면에서 그같은 우려는 나름의 타당성을 갖고 있다. 탄소세 정책은 화석연료 기업들이 선호하는 정책모델로 등장했다. 발전소와 기타 산업시설에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에 대한 규제가 수립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탄소세든 아니든 규제가 아예 없는 상황이 가장 좋지만, 바이든정부 들어서 무언가 하나는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다. 블룸버그는 이를 ‘현실적 타협’이라고 표현했다.

석유·가스기업들의 입장 변화는 오일메이저들이 전기차와 천연가스, 신재생에너지 등에 대거 투자하는 시점과 맞물린다. 이들 역시 탄소세로부터 혜택을 받을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엑손모빌은 2009년 세수중립 탄소세를 지지했다. 그리고 최근의 법제화 노력에 로비자금을 제공했다. 코노코필립스 BP 로열더치셸도 마찬가지다.

탄소세 정책은 중소규모의 독립적 석유·정유기업들에겐 치명타가 된다. 이들의 주력 제품은 탄소를 많이 배출한다. 오일메이저들은 이들에 대해 추가적인 경쟁력을 얻을 수 있다. 중소규모 기업들 역시 미국석유협회 회원사다. 피라미드 계층제에서 향후 긴장이 고조될 수 있는 지점이다.

탄소세 지지 방침은 미국석유협회와 주요 회원사들에게 ‘할 만큼 하고 있다’는 구실을 제공한다. 주요 기업들은 주주들로부터 ‘탄소저감 노력에 동참하라’는 거센 압박을 받고 있다.

한편 미국석유협회는 전기차 보조금 반대엔 일관적이다. 가솔린 수요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또 트럼프행정부 때는 메탄가스 배출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적극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다 올 1월 ‘바이든행정부와 협력할 용의가 있다’며 입장을 바꿨다.

얼마 안돼 회원사이자 프랑스 에너지기업인 토탈사가 협회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유는 협회의 화석연료 로비, 협회가 미 정부의 파리기후협약 복귀를 반대한 것 등을 이유로 들었다. 환경단체들의 거센 압박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환경단체들은 이제 BP와 로열더치셸에 협회 탈퇴를 압박하고 있다. 두 기업 모두 ‘205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정치적 난관도 만만찮아

협회의 지지방침에도 탄소세 제정과 시행까지는 정치적 난관이 여전하다. 민주당의 많은 의원들은 1993년 ‘열에너지 세금 논쟁’의 상흔을 갖고 있다.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제안한 이 법안은 풍력과 태양광, 지열을 제외한 모든 연료를 대상으로 열함유량에 기반해 세금을 매기자는 내용을 담았다. 하원을 통과했지만 상원에서 부결됐다. 이 법안에 찬성한 민주당 하원 상당수가 이듬해 선거에서 낙선했다.

탄소세에 대입해 보면 현재는 더 까다롭다. 일단 상하원이 팽팽하게 양분돼 있다. 또 코로나19 팬데믹에 고통받는 상황에서 에너지와 관련해 또 다른 비용을 부과하려는 시도가 대중에 통하기 어렵다는 정치권의 판단도 크다.

그럼에도 석유업계의 지지는 워싱턴 정가의 셈법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알래스카 상원의 리사 머카우스키 의원과 유타주의 밋 롬니 의원 등 중도적인 공화당 의원 일부는 탄소세 구상에 열린 입장을 갖고 있다. 민주당 웨스트버지니아주 상원 조 맨친 의원 등 석탄생산 지역구 출신의 일부 의원들도 개방적이다.

지역구의 미래를 계속 화석연료에 묶어둘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미래를 계획하는 광산촌에 탄소세 예산이 상당히 배분될 것을 기대한다.

미국석유협회 집행부와 회원사들은 탄소세 지지 성명서에 담길 내용, 톤당 가격 등 다양한 측면을 논의할 예정이다. 이달 말 회원사들의 투표를 거쳐 공식성명서를 발표할 가능성이 크다.

하버드대 앨디 교수는 “화석연료 기업들이 탄소세 지지 성명을 내는 것도 좋지만, 온건파 공화당 의원들을 지지 입장으로 끌어들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김은광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