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진단

신장위구르 무슬림과 아프가니스탄

2021-11-25 12:26:19 게재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

중국 내 무슬림은 모두 10개 민족으로 전체 인구의 1.8%인 약 2500만여명으로 추산한다. 이중 후이족(回族)이 약 1050만명으로 가장 많고, 위구르족이 약 1000만 명으로 그 뒤를 바짝 뒤따르고 있다. 카자흐족은 3번째로 많은 160만명으로 집계한다.

무슬림은 이슬람 발흥 초기인 7세기부터 중국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구당서(舊唐書)에 따르면, 이슬람 정통 칼리파 시대 3대 칼리파 우스만(Uthman)이 당 조정에 사신을 보낸 것이 양측 관계의 시작이다.

751년에는 서로 군사적으로 대립했다.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이 이끈 당군은 오늘날 키르기즈스탄과 카자흐스탄 국경 사이에 흐르는 탈라스(Talas)강에서 신흥 이슬람 칼리파 압바스(Abbas) 칼리파조 군에게 패배했다. 이때 포로로 잡힌 당나라 군인이 무슬림 세계에 종이 만드는 기술을 전수했다고 한다.

당은 755년 안록산의 난 당시 과거의 적이었던 압바스 칼리파조에 도움을 청해 원병을 지원 받았다. 이때 상당수의 무슬림 군인들이 당의 수도 장안(오늘날 시안)에 머물렀다. 또 광저우(廣州) 톈저우(泉州) 등 동남해안 도시에는 이미 무슬림들이 상인으로 왕래하거나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무슬림은 오늘날 서안에서 이란 호라산 (khorasan) 지역으로 이어지는 육로와 바그다드 페르시아만 인도양 태평양을 거치는 해로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왔다.

이슬람 발흥 초기부터 중국과 교류

무슬림이 중국에서 가장 흥한 시기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 때다. 몽골인들은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페르시아계 무슬림을 중용했다. 이른바 색목인(色目人)들이 이슬람 중국 전파에 일조했다. 무슬림이 중국 문화를 수용해 소화하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한참 후대인 16세기로 명나라 후반기다. 산시의 후덩저우(1522~1597)가 세운 무슬림 교육기관 경당(經堂)에서 중국어로 자신의 종교를 알리는 지식인이 나오면서부터 진정한 의미의 중국 이슬람이 등장했다.

왕다이위(1573~?)가 쓴 현존 최초의 이슬람 소개 중국어 서적 정교진전(正敎眞詮)을 시작으로 마주(1640~?)의 청진지남(淸眞指南), 류즈(1644~1730)의 천방성리(天方性理) 천방전례(天方典禮) 천방지성실록(天方至聖實錄) 등이 등장했다. 특히 마주와 류즈는 유학에 조예가 깊은 이른바 회유겸통(回儒兼通)의 무슬림 학자다.

그러나 중국 지식인의 이슬람 평가는 박했다. 류즈의 천방전례는 사고전서(四庫全書)에 포함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바탕이 잘못되면 좋은 말은 소용이 없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정부는 무슬림들이 마주나 류즈 같은 무슬림처럼 중국 문화에 동화해 살아가길 바란다. 특히 신장 지역 위구르 무슬림들이 그러길 바란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다.

국제문제로 떠오른 위구르인 탄압

중국 전체 면적의 1/6을 차지하고 지하자원이 풍부한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중앙아시아로 나가는 관문으로, 중국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일대일로에서 핵심지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 주민은 대다수가 튀르크계 위구르인 무슬림으로 중국 한족과는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

신장은 19세기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를 두고 영국과 러시아가 벌인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희생양이다.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1884년 청이 신장을 점령하는 것을 지지했다. 중국정부는 청나라가 원래 중국령이었던 곳을 다시 돌려받았다는 뜻에서 이곳을 신장(新疆), 즉 '새로운 강토'라고 이름 지었다고 강조한다.

위구르인들은 1933~1934년, 1944~1949년 두차례 짧은 독립의 기쁨을 누렸을 뿐, 1949년 이래 신장은 중국령이다. 중국은 1955년 신장을 자치구로 지정했지만, 주민들을 중국인으로 동화하지는 못했다. 개혁개방에 힘입어 서부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신장으로 한족 이주 정책을 실시했다. 완전한 중국령으로 만들기 위한 대규모 식민정책이다. 그 결과 한족이 신장 지역 경제권을 장악했고, 위구르인들은 2등 시민으로 전락했으며, 신장의 수도 우루무치는 한족의 도시로 변모했다.

위구르인들이 중국의 정책에 반발해 저항과 독립의 기운을 보이자 중국정부는 1998년부터 '엄타'(嚴打)'라는 작전명을 내걸고 반발하는 위구르인들을 강력하게 진압했다. 특히 이슬람 신앙도 엄히 단속해 18세가 되기 전에는 종교 관련 교육이나 활동을 완전히 금지했다. 주민들이 거주지를 벗어난 곳의 모스크에 가는 것 또한 불법이다. 중국정부는 위험한 인물로 판단한 위구르인을 '직업교육훈련센터'에서 '재교육'한다. 중국인으로 만드는 교육이다. 위구르인의 언어를 중국어로 바꾸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위구르족 탄압 관련한 내용이 국제적 논란이 되기 시작한 올 4월 중국정부는 샤오캉백서를 발간, 신장위구르자치구 등 8개 지역 소수민족 집단 거주 지역 거주민 1560만명 이상이 정부의 빈곤타파 정책의 혜택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직업교육훈련센터는 여전히 국제사회에서 논란의 대상이다. 중국정부는 학교라고 하지만, 국제사회는 수용소라고 비난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설을 인권유린 시설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나라 대부분은 비무슬림 국가들이라는 사실이다. 무슬림 국가들은 조용하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무슬림이 조금이라도 차별을 받으면 모든 매체를 동원해 비난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중국정부 지원 급한 탈레반은 고분고분

신장과 아프가니스탄이 맞닿은 와한(Wakhan) 골짜기를 중심으로 혹시라도 위구르 독립 세력이 세를 불릴 것을 염려해 중국은 탈레반이 재집권하기 한달 전 톈진에서 탈레반 대표단을 만나 아프가니스탄 내 위구르 반중독립세력 통제를 요청했다. 중국의 경제적 지원이 절실한 탈레반은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고 호응하면서 중국을 안심시켰다. 최근에도 탈레반은 중국정부에 아프가니스탄 내에는 위구르 독립 세력이 없다고 재확인해 주었다.

그러자 탈레반과 대립하고 있는 아프간 내 IS-호라산(IS-K)은 보란 듯이 위구르 출신 대원을 내세워 쿤두즈(Kunduz)에서 자살폭탄 공격을 감행했고, 중국에 고분고분한 탈레반을 "창녀"라고 부르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탈레반이 팔레스타인과 카슈미르 지역 무슬림의 저항을 지지하면서도 중국의 신장위구르 무슬림 억압정책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의 대의경쟁에서 탈레반이 밀리는 형국이다. 이는 갈수록 탈레반에게 큰 짐이 될 전망이다.

그러나 신장 독립운동을 펼치는 위구르인들은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의 신장 지지가 부담스럽다. 9.11 테러 이후 중국정부가 위구르인들을 모두 테러분자로 몰아 신장 독립운동을 탄압해왔기 때문이다. 위구르 독립운동가들은 폭력을 앞세운 극단주의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중국과 관련해서 무슬림들은 예언자가 했다는 '중국까지 가서라도 지식을 구하라'(Utlub al-'ilm wa law fi's Sin)는 말을 가장 즐겨 인용한다. 무함마드가 한 말은 아니라고 하는데, 위구르 독립운동에 머리 아픈 중국으로서는 적어도 무슬림들이 와한 골짜기를 통해 신장으로 들어오지 않길 바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