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행, 나홀로 완화정책 고수 '딜레마'

2021-12-21 10:50:52 게재

미·유럽 잇따른 긴축에도 돈풀기 고수

구로다 총재 "금융완화 끈기있게 계속"

엔저로 수입물가 폭등 소비자 부담 우려

일본 중앙은행이 장기간 이어지는 통화 및 금융완화정책으로 딜레마에 빠졌다. 유럽과 미국 등 선진경제권이 본격적으로 통화긴축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일본만 돈풀기 정책을 지속하는 셈이어서 엔저 등에 따른 국민부담의 가중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일본은행(BOJ)은 지난 17일 금융정책결정회의를 열어 일부 금융완화정책의 축소를 결정했지만 사실상 마이너스 금리와 대규모 국채 매수 등 기본 기조를 이어가기로 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이날 회의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유럽과 미국은 상당한 인플레이션 국면이지만 우리나라는 2%까지는 아직 상당히 멀다"며 "대규모 금융완화정책을 끈기있게 계속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일은은 이날 회의에서 △마이너스 수준의 장단기 금리정책 지속 △연간 12조엔 상한의 ETF 매입 지속 △금융기관에 대한 자금공급 내년 9월까지 연장 등의 완화정책을 지속하기로 했다. 일본은 이미 코로나19 확산 이전부터 단기금리는 마이너스 0.1%, 장기금리의 경우 0% 수준으로 유지하는 대규모 통화완화정책을 수 년째 지속하고 있는 데 이를 당분간 유지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다만 일은은 이날 회의에서 기업어음(CP)과 회사채 등 20조엔을 상한으로 하는 대규모 채권 인수는 예정대로 내년 3월에 종료하기로 했다.

일은의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과 유럽 등 다른 선진국 중앙은행과는 다른 행보이다. 실제로 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지난 15일(현지 시각)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열어 현재 진행 중인 자산매입 축소(테이퍼링)의 속도를 높여 내년 3월쯤 마무리하고, 이후 3차례 정도의 정책금리 인상을 예고했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도 지난 16일(현지 시각) 열린 통화정책회의에서 기준금리를 기존 0.10%에서 0.25%로 인상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같은 날 기준금리를 현행 0%로 동결하면서도 자산 매입 속도를 단계적으로 낮추고,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채권매입을 내년 3월에 중단하기로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일본언론은 이날 일은의 결정에 대해 미국, 유럽 등과 다르게 가는 것에 대한 우려를 전했다. 당장 엔저가 빠라지고 있다. 6개월 전 1달러당 110엔 안팎이던 환율은 20일 현재 113.50엔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 그나마 지난달 말 115.33엔까지 치솟았던 것에서 다소 진정된 수준이다.

세계적인 공급망 혼란에 따른 인상압력에 더해 엔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수입물가의 급등과 생산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일본의 수입물가는 전년 동기에 비해 44%나 급등했다. 에너지 가격의 급등으로 생산자물가지수도 전년 동기대비 9.0%나 올라 41년 만에 최고치를 보였다. 에너지 뿐만 아니라 철과 건자재 등 각종 중간재도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다만 지난 10월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1%에 그쳐 아직 본격적인 여파가 미치지는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로다 총재도 이러한 점을 근거로 물가목표인 2%에 크게 멀다면서 금융완화정책 유지의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민간 경제예측기관에서는 내년이후 본격적인 소비자물가 상승의 파도가 덮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단적으로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미미했던 점도 휴대전화 요금의 인하 등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이미 자동차와 컴퓨터 등 일부 내구 소비재 가격의 오름세가 심상치 않고, 최근 식품업체들이 케첩 등 가공 식료품 가격을 인상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민간에서는 지금과 같은 추세가 이어질 경우 내년 봄 이후 소비자물가가 1% 중반대 이상의 오름세를 예상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경제 전반이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각종 물가지수의 급등은 기업의 비용 증가로 연결된다"며 "임금상승이 따르지 않으면 가계의 부담도 급증해 소비 전반의 악화로 연결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고노 료타로 BNP파리바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이 신문과 인터뷰에서 "생산거점을 해외로 이전한 기업이 많아 수출은 늘어나지 않고, 방일 관광객이 늘어나는 효과도 없다"면서 "국내 비제조업과 중소기업의 비명이 커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심지어 일본은행 한 관계자도 "환율이 1달러 120엔까지 오르면 구로다 총재도 (정책기조의) 톤을 수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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