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무책임 저신뢰 고위험 사회

2023-07-24 11:39:46 게재
오송 지하차도 수몰 참사는 여러 면에서 이태원 참사의 데자뷰다. 사고 발생 몇시간 전 인근 하천에 홍수경보가 내려지는 등 위험신호가 있었지만 교통통제 등 사고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아 큰 인명 피해가 났다. 참사 후 정부 관계자들이 서로 '우리 관할 아니다'며 발뺌하고 네 탓 공방하며 책임을 회피한 행태도 놀랍도록 비슷하다.

대통령실은 집중호우로 인한 재난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방문을 결정한 배경을 설명하며 "지금 당장 대통령이 서울로 뛰어간다고 해도 상황을 크게 바꿀 수 없다"고 했다. 김영환 충북도지사는 사고 발생 6일 만에야 사과하면서 "(일찍) 거기 갔다고 해도 상황이 바뀔 것은 없었다"고 말해 희생자 유가족 가슴을 멍들게 했다. 충북 경찰은 112 신고를 받고도 참사 현장에 출동하지 않았다.

오송지하차도 참사는 이태원 참사 데자뷰

이는 지난해 10월 이태원 참사 직후 이상민 행정안전부장관이 "경찰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고 말한 것과 흡사하다. 두달 앞서 서울지역 수해 때 일찍 퇴근한 윤 대통령에 대해 대통령실이 "재난 발생 때 대통령실이 직접 지휘에 나설 경우 현장에 상당한 혼선이 발생한다"고 변명한 것도 마찬가지다.

여론은 재난 그 자체 이상으로 재난에 대처하는 정부와 고위 공직자의 태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정부의 무책임과 공직사회의 무사안일 행태는 이태원 참사에서 이미 누누이 지적됐다. 하지만 정부 여당의 재난 대응방식은 변하지 않았고, 사전에 긴밀히 안전조치를 취했으면 막을 수 있었던 안타까운 희생이 반복됐다.

이 때문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줄 국가가 존재하느냐는 물음과 함께 국가 시스템과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까지 위협받고 있다. 자본과 토지, 노동력 등 생산의 3요소만 갖춘다고 기업 활동 및 나라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같은 물건과 서비스라도 좋게 만들려면 기술과 디자인, 아이디어가 긴요하다. 여기에 기업 가계 정부 등 경제주체간 탄탄한 신뢰 구축을 비롯한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 충실해야 보다 경쟁력 있는 제품 생산과 서비스가 가능하다.

국가 시스템과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 저하는 사회를 안정시키고 지속가능하게 하는 기반인 사회자본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무책임한 정부와 무사안일한 공공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 저하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 걸쳐 위험을 증대시켜 우리 사회 전반을 '고위험 사회'로 만들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저출생 고령화만 걱정할 때가 아니다. 무책임 저신뢰 고위험 사회가 심각한 문제로 다가와 있다. 저출생 고령화는 청년층 등 경제활동인구의 고령층 부양 부담을 높이지만, 저신뢰 고위험화는 국가 시스템 전반을 마비시킬 수 있다. 무책임 저신뢰 고위험사회는 미래 발전은커녕 오늘의 안녕도 담보하지 못한다.

'신뢰' 자본 약화 … 정부 책임성 회복 시급

사람들이 가슴 아픈 사고가 잇따라 뉴스 보기 힘들다고들 한다. 재난에 대한 사전대응과 위기관리가 소홀한 '무정부 상태' 경험이 누적되면서 여론은 물론 경제심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얘기다. 사회 전반의 저심리 고위험화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정부와 공직사회의 책임성 회복이 시급하다.

기업이든 국가든 재난대응을 포함한 위기관리의 요체는 지도자의 리더십 발휘와 구성원간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다. 일이 터지면 최고 지도자가 제때 직접 나서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성 있게 사과해야 한다. 확실한 재발방지 대책으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다. 조직의 위기는 책임의식과 리더십 부재에서 잉태되고 커진다. 위기에 대한 관리를 넘어 기회로 전환시키려면 구성원들이 각자 위치에서 주어진 역할을 책임지고 해야 한다. 권한이 큰 선출직 공직자일수록 더욱 그렇다. 지도자가 화를 내며 아랫사람만 다그쳐도 곤란하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올해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은 4개 주요 부문 중 경제 성과, 기업 효율성, 인프라는 개선되거나 지난해와 같았는데 정부 효율성만 미끄럼을 탔다. 특히 관료주의는 지난해 57위에서 최하위권인 60위로 추락했다. 위급한 재난 상황에도 움직이지 않고 묵묵부답인 정부를 보려고 국민이 세금 내는 게 아니다.
양재찬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