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경제민주화다 | ③ 공정시장 틀을 만들자

소비자·소액주주들이 강한 권리행사, 기업 불법행위 견제

2017-01-13 10:25:46 게재

집단소송법 확대, 다중대표소송 도입 필요 … "자발적 권리행사, 민주화 본질"

삼성전자 소액주주 22명이 삼성전자 전·현직 임원을 상대로 낸 주주대표 소송에서 2005년 승소 확정판결을 받아낸 건 재벌기업의 전횡에 제동을 건 획기적인 사건이다.


98년 참여연대가 소액주주들을 모아 소송을 제기해 6년 만에 이뤄낸 일이다. 이건희 회장과 전·현직 임원 5명은 회사에 190억원을 배상했다. 삼성전자는 삼성종합화학의 비상장 주식을 삼성건설과 삼성항공에 매각하는 과정에서 순자산가액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헐값에 처분했다. 삼성전자 이사들은 경영진의 결정에 동의하는 거수기 역할을 했다가 배상책임을 짊어졌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 자금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제공한 것에 대해서도 회사에 70억원의 배상책임을 져야 했다.

법원 판결이 나온 이후 기업 총수들이 회사자금을 꺼내 불법 정치자금 등으로 제공하는 관행은 점차 사라졌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등에 출연하는 형식을 갖춰서 기업들이 자금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경제민주화는 재벌 총수일가 중심으로 쏠린 권한과 부의 편중에 따른 부작용을 소비자와 소액주주의 자발적인 권리실현으로 완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집단소송제의 전면도입과 다중대표소송제 등의 도입 필요성이 큰 이유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경제민주화가 실효성과 지속가능성이 있으려면 정부에 의한 규제가 아니라 이해당사자가 자발적으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며 "그게 바로 시장 기능에 따른 경제민주화의 본질에 가까운 접근 방법"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한 재벌 견제는 행정규제에 의한 것이라서 기준완화에 따른 로비가 작용하거나 대통령·공정위원장이 누구냐에 집행력이 달라지는 등 예측가능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증권집단소송 12년간 9건 제기 = 집단소송은 소비자와 소액주주들이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으로 일반 소송과 같다. 하지만 피해자 일부가 제기해 승소하면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 모두가 배상을 받는다는 점에서 피해자 구제 효과가 훨씬 크다.

소송당사자뿐만 아니라 피해자 전원에 대해 기업이 배상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기업으로서는 상당한 부담이지만 소비자와 소액주주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제도다. 기업이 불법행위를 저지를 경우 막대한 타격을 입는다는 점 때문에 사전 예방 효과도 크다.

국내에는 2005년 증권집단소송에 한해 도입됐다. 재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소송 대상이 불공정거래와 분식회계 등으로 제한됐다. 그마저도 재계에서는 집단소송제도가 도입되면 소송이 급증해 기업들이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제도가 도입된 지 12년이 지났지만 소송 제기는 9건뿐이다. 판결이 나온 사건은 1건도 없다. 까다로운 소제기 조건과 소송결과가 나오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개인들이 소송을 제기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피해를 본격적으로 다퉈보기 전에 소송의 대상이 되는지를 가리기 위해 법원의 허가 결정(이의제기 허용, 대법원 최종결정)을 받아야 하는 등 사실상 6심제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업의 불법행위를 입증할 자료를 사실상 기업이 독점하고 있어 증거확보에도 어려움이 있다. 개인들은 비용측면에서 규모가 작은 로펌을 선임할 수밖에 없는데 반해 기업들은 대형로펌들로 맞서고 있다.

미국은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로펌들도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소송에 따른 모든 비용을 부담한 뒤 성공보수조건으로 소송을 수임하고 있다.

또한 강력한 증거개시제도를 갖추고 있다. 소송당사자간 요청에 의해 소송과 관련된 증거를 공개하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증거를 통해 기업을 압박할 수 있어 조기에 화해로 종결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우리나라는 증권집단소송을 수행하기 어려운 여건이지만 12년 동안 점차 법원과 법조계의 인식 변화 등으로 최근 법원의 소송허가 결정이 잇따랐다. 오는 20일에는 첫 판결도 나올 예정이다.

김주영 변호사는 "증권관련집단소송이 사문화됐다는 시각도 있지만 점차 정착해 나아가는 단계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며 "조기에 화해 종결된 진성티이씨 사건의 경우 소송을 제기한 원고는 2명에 불과하지만 소송허가절차에서 피해자가 1718명으로 드러나 27억원의 배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비록 미국의 집단소송 화해액수와는 큰 차이가 있지만 피해자 집단 전체에게 실질적인 배상이 이루어졌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형 집단소송제 설계할 때 =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계기로 집단소송제를 전면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올해 업무계획에서 고의 과실로 소비자의 생명·신체에 중대한 손해를 입힌 제조사에 최대 3배의 무거운 손해배상책임을 부과하는 징벌적 배상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좌혜선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자율분쟁조정위원회 사무국장은 "소비자와 사업자의 힘의 균형이 이루어졌을 때에만 소비자의 주체성이 진정으로 확보될 수 있다"며 "그 실현수단이 소비자 집단소송제도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의 집단소송제를 그대로 도입할 것인지 대해서는 학계와 법조계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나라 현실에 맞는 집단소송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김 변호사는 "미국식 집단소송을 소비자소송분야에 도입할 경우 여러 가지 문제점이 예상될 수 있다"며 "증권집단소송과 달리 소비자소송의 경우 피해자들의 협조 없이는 피해자의 수와 인적 사항을 특정하기도 쉽지 않고 피해자들의 피해내역을 확정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소비자소송에서는 피해자 특정 및 피해액 확정을 위해 피해자의 협조가 필요한 점을 고려해 미국식이 아닌 피해자의 참가신청을 받는 방식(opt-in)을 도입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희석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해말 소비자집단소송제 제정을 위한 토론회에서 "소비자단체들이 소송을 제기하고 그 결과를 지켜본 뒤 피해자들이 소송에 참여하는 일본형 모델이 가장 적절하다"고 말했다.

다중대표소송, 총수일가 사익편취 막아 = 총수일가의 사익편취를 막기 위한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논의도 일고 있다. 상장회사의 지배주주 또는 경영진이 비상장 자회사를 통해 사익을 추구하는 관행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는 지난해 다중대표소송제 도입을 포함한 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모회사 발행주식총수의 1% 이상을 가진 주주가 자회사에 손해를 끼친 자회사 임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는 내용이다.

현재는 자회사가 비상장회사일 경우 감독과 견제, 소수 주주를 보호할 수 있는 관련 규정이 미흡하고 특히 모회사의 주주가 권리를 구제받기 어려운 구조다.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도 다중대표소송제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김종인 전 대표의 발의안이 청구요건을 모회사가 자회사 지분의 50% 이상인 경우로 했다면 채 의원은 지분율을 30%로 해서 대상을 더 확대했다.

경제개혁연대는 "계열회사간 출자구조가 매우 복잡한 우리나라 기업집단의 현황을 고려할때 다중대표소송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채이배 의원안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김상조 교수는 "상법 개정 논의에서 다중대표소송제 도입은 제일 먼저 결론이 나올 정도로 전문가들의 합의가 형성돼 있다"며 "비상장회사에서 벌어지는 총수일가의 사익편취에 대한 강력한 예방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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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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