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3.1만세운동 때 태극기 들었나

2019-02-28 11:42:05 게재

독립운동가 백용성 스님 재조명 … 33인 민족대표 구성 막후 조정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나가는 종속국이 되지 말고, 주인다운 주인이 되는 주인국이 되어라."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용성(1864~1940) 스님의 유훈 중 일부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백용성 스님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활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사진은 27일 오후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가 주관한 '독립운동가 백용성 : 잊혀진 백년의 진실' 토론회에 참석한 인사들. 사진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제공


2차 북미정상회담을 비롯해 요동치는 한반도 운명을 미리 예견하기라도 한 듯한 용성 스님의 유훈은 지금도 유효한 가르침이다.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우리 사회 곳곳에서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발굴과 재조명이 일어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용성 스님도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이사장 법륜스님)가 주관한 '독립운동가 백용성 : 잊혀진 백년의 진실'이라는 주제의 토론회가 마련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27일 오후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린 이번 토론회는 용성 스님(백상규)의 독립운동 역사를 재조명하는 자리였다.

주제발표를 맡은 법륜 스님은 일반인들도 궁금해 할 3.1운동에 대한 다양한 의문들을 용성 스님의 행정과 역할을 통해 재조명했다.

'왜, 3·1 만세운동에서 태극기를 사용했을까', '대한민국 국호의 탄생 배경은 무엇일까', '왜, 민족대표는 33인으로 구성되었을까', '만주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화과원과 용정 대각사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누가 윤봉길을 김구에게 보냈을까', '대한의사군 창설과 조중연합군 추진의 실체는 무엇인가' 등이 대표적이다.

법륜 스님은 발제를 통해 이미 1906년에 용성스님이 '대한민국'을 언급한 것으로 설명했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는 대한민국이 수립되어지이다'라는 발원 기도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는 것이다.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사용한 배경에도 용성 스님의 역할이 작용했다고 한다.

천도교측에서 독립이라고 써진 깃발이나 반도기를 들 것을 제안했고, 기독교 장로교나 감리회측에서도 이를 받아들인 상태였다. 하지만 불교계 대표였던 용성 스님이 태극기가 각 종교에서 추구하는 지고의 선을 상징한다고 설명하면서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손병희 천도교 교주와 오세창, 한용운 등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또 민족대표 33인이 정해진 배경에도 용성 스님의 역할이 엿보인다. 3.1운동 1년 전인 1918년 용성스님은 손병희 교주를 찾아가 독립운동 거사를 논의하면서 민족대표를 천도교 불교 기독교 각 11인으로 하는 33인으로 제안했다. 인간세계 4주를 지배하고 있는 도리천 33천의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당시 손병희는 천도교 30인과 불교 3인을 제안했다가 용성스님의 이 같은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기독교에 제안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장로회와 감리회가 각각 11명을 배정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갑론을박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용성스님이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장로회 8인+감로회 8인) 그리고 불교계에서 용성스님과 한용운 두 사람만 들어가는 것으로 절충안을 제안해 최종적으로 33명이 됐다.

이밖에도 용성스님은 윤봉길 의사를 상해임시정부 김구에게 보내기도하고, 홍범도 장군과는 대한의사군 창설과 조중연합군을 상의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을 도모하며 막후 역할을 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가 심어둔 밀정에 의해 만주와 연해주를 넘나들던 스님의 지하독립운동 노선마저 일망타진된다. 불교계 내부에서도 용성스님은 일제에 의해 왜색으로 변질돼 가던 흐름에 반대해 개혁을 주도하고 호국불교의 맥을 잇기 위해 노력했다.

독립운동의 성격상 기록이나 자료가 거의 없어 잘 알려지지 않은 스님의 독립운동 기여도는 해방 후 귀국한 김구 선생이 임정요인 30여명과 함께 서울 종로 대각사를 방문해 입적한 용성스님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당시 김구는 "용성 조사의 항일 정신과 불교중흥을 위한 노력이 세상에 빛을 보게 돼 기쁘다. 용성 조사는 이미 열반하셔서 안타깝지만 스님의 크고 깊은 뜻을 동지들이 잊지 말아야 한다"고 술회했다.

법륜 스님은 '사분오열의 과보를 되풀이 하지 말라' '종속국이 아니라 주인국이 되라'는 용성 스님의 유훈을 이어 사회통합과 국민화합이 무엇보다 절실하며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 길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 ① 임시정부 수립한 임시의정원] 12시간 밤샘회의 거쳐 '한' '민' 담은 국호 '대한민국' 결정
'정부수립 4월 11일' 입증
성북구엔 더이상 '인촌로' 없다
인천 오류투성이 역사달력 '곤혹

[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연재기사]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정재철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