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 ① 임시정부 수립한 임시의정원

12시간 밤샘회의 거쳐 '한' '민' 담은 국호 '대한민국' 결정

2019-02-28 11:33:22 게재

임시의정원 설치 4월 10일, 임시정부수립 4월 11일

집정관제 아닌 내각제 선택 … '공화국' 선포

김대지 김동삼 김철 남형우 백남칠 손정도 조소앙 선우혁 신석우 신익희 신채호 신철 여운형 여운홍 이광 이광수 이동녕 이시영 이영근 이회영 조동진 조동호 조성환 조완구 진희창 최근우 한진교 현순 현장운.

29명의 독립운동가는 어둠이 짙게 깔린 밤 10시에 한 곳에 모였다. 중국 상해 김신부로 60번지였다. 조국에서 시작한 3.1운동이 상해에 알려진 1919년 3월 4일 이후 한달여 지난 1919년 4월 10일이었다. '독립선언문'으로 선포한 독립국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1919년 9월)사진 | 상해의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국내의 한성정부 등 3개로 분리된 임시정부를 하나의 임시정부로 통합한 기념으로 찍은 사진. 자료 독립기념관


이들은 3.1 운동 직후 상해로 쏟아져 들어온 독립운동가들이었다. 프랑스조계 보창로에 독립임시사무소를 두고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했다. 한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준 프랑스조계가 일본의 감시망을 쉽게 피하는 데 최적격지였다.

◆4월10일 밤 10시 시작 = 29명의 독립운동가들은 먼저 모임의 이름을 '임시의정원'이라고 했다. 조소앙의 동의와 신석우의 재청으로 가결됐다.

의장단 선거가 이어졌다. 의장 1명, 부의장 1명, 서기 2명을 뽑자는 이광수의 의견이 채택됐다. 무기명 단기식투표를 실시했다. 이동녕을 초대 의장으로 선출했다. 부의장은 손정도, 서기는 이광수 백남칠이 맡기로 했다. 29인회가 임시의정원 제 1회 임시회로 전환됐다.

곧바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최근우의 제안으로 '임시정부' 토의를 시작했다. 강대현(경성독립본부와 상해 독립임시사무소를 오가며 밀사역할을 한 인물)이 본국에서 가져온 '임시정부 조직'을 어떻게 처리할 지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상해에서도 임시의정원 조직과 회의를 주재할 의장선출까지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본국 임시정부 조직'은 이동휘를 정부 수반으로 한 집정관제 임시정부 조직안이었다. 백남칠과 이영근이 "본국에서 조직된 임시정부를 부인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부결됐다. 토론이 길어졌다.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결국 관제(행정조직)와 국무원 선거를 나눠 의결하자는 방안으로 갈래를 잡았다.

◆'황실 우대'에 맞선 여운형 = 먼저 나라이름을 정했다. 신석우의 동의와 이영근의 재청으로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결정됐다. 9년전(1910년)에 빼앗긴 '대한제국'을 버리고 국민이 주인인 '대한민국'으로 새롭게 태어난 순간이었다. 조선민국, 고려공화국 등도 제안됐으나 '한'과 '민'이 채택되면서 제외됐다.

그러고는 '대한민국임시헌장' 의결에 들어갔다. 현순과 신석우가 각각 동의, 재청한 '신익희 이광수 조소앙이 30분안으로 심사안을 보고하게 하자'는 안이 가결됐다. 이에 앞서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남현우 등 4인 위원회는 기초작업을 마무리지어 놨다. 서울과 상해에서 논의된 헌장을 놓고 토의, 결정했다. 별다른 이견없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전체회의에서는 기초 토의에서 통과된 임시헌장안에 병역의 의무를 추가했다. 구황실을 우대한다는 8조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찬성론자는 "고종이 승하할 때 수많은 군중이 대한문 앞에서 통곡했다"며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황실 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대론자는 '망국의 책임'을 언급하면서 "황실 우대는 국민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여운형은 "망국의 울음은 아무 때나 울면 잡혀갈 처지였기 때문에 참고 있다가 핑계 김에 기회를 얻어 운 것"이라며 "황실 그 자체를 생각한 울음은 아니었다"고 강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황실옹호론자를 꺾진 못했다. 결국 원안에서 '일생'이란 단어를 빼는 정도로 가결됐다. '민주공화국'을 담은 임시헌장은 곧바로 공포됐다.

◆이승만을 막아선 신채호 = 마지막 단계는 관제를 정하고 국무원을 선출하는 정부 수립 절차였다. 국내에서 제안한 집정관제가 총리제로 바뀌었다. 법무부와 군무부가 새로 생겼다. 국무원 인선은 29명의 선거로 결정했다. 날짜는 이미 4월 11일로 넘어가 있었다.

신석우가 서울에서 조직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인 이승만을 국무총리에 임명하자고 동의하고 조완구가 재청했다. 신채호가 반기를 들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문제를 거론하며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한진교가 재청해 결국 선거를 치르기로 했다.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요구안을 우드로 토마스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위임통치 청원문제는 정부수반 결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승만과 추가로 3명을 더 추천받은 후 4명을 놓고 투표를 진행하기로 했다. 출석자 3분의 2의 찬성이 나와야 추천자 이름에 올릴 수 있었다. 박영효, 박용만, 이상재, 신채호, 안창호, 이동녕, 조성환, 김규식, 이회영이 천거됐지만 가결된 것은 안창호와 이동녕 뿐이었다. '이승만 국무총리'를 거부한 신채호를 현창훈이 장난스럽게 추천하자 폭소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신채호는 화를 내며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한성에서 온 임시정부 명단에 집권관으로 지목됐던 이동휘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서울서 추천한 집정관 이동휘는 군무총장으로 격하 = 한명 더 추천받아야 했지만 좀처럼 찾아낼 수 없었다. 이승만 안창호 이동녕을 놓고 무기명 단기식 투표로 진행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로 이승만이 선출됐다.

내무(안창호) 외무(김규식) 교통(문창범) 총장 선출안은 동의와 재청후 가결됐다. 재무 군무 법무총장은 각각 3명씩 후보를 천거한 후 선거를 거쳐 최재형, 이동휘, 이시영을 뽑았다. 차장 선거에서는 재무차장 이춘숙만 동의(한진교)와 재청(여운형) 후 가결시키는 방식으로 선임했다. 내무(신익희) 외무(현순) 교통(선우혁) 군무(조성환) 법무(남형우) 차장은 상해에 있는 사람 가운데 두 배 수를 추천해 투표로 결정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순간이었다. 끝내고 나니 서울에서 보내온 임시정부 조직과 크게 달라졌다. 이승만 안창호를 비롯한 대부분의 내각이 미국 연해주 부격 등에 흩어져 있어 취임식이나 정부수립 선포식을 할 수는 없었다.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4월 11일 오전 10시에 폐회됐다.

(이 기사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공식 초기 의정원 회의문서인 '임시의정원기사록'을 토대로 작성했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의 자문을 받았다. 여운홍의 '몽양 여운형'과 현순의 자서전도 참고했다. 이재호 박사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연구'가 줄기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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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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