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은행권 '한식에 죽나 청명에 죽나' 직면

2023-03-20 11:15:45 게재

은행자산, 장부 대비 2조달러 낮아 … 이코노미스트 "SVB 파산, 도미노붕괴 첫단계일 수도"

은행업은 신뢰산업이다. 많은 예금자가 동시에 예금 인출을 원하면 은행은 살아남을 수 없다. 금융 역사가 파산으로 점철된 이유다. 생존 비결은 고객이 예금을 인출할 이유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 16위 규모 대출기관인 실리콘밸리뱅크(SVB)는 이를 관리하지 못해 파산했다.

미국 재무부장관을 지낸 래리 서머스는 "SVB 파산이 다른 은행들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파산 다음날 다른 은행에도 예금인출 요청이 쇄도했다는 점을 볼 때 사실 상당한 파급력이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시그니처뱅크다.

미국 금융당국은 즉각 개입했다. 연준과 재무부는 두가지 조치를 발표했다. 첫째 SVB와 시그니처의 예금자가 인출을 원할 경우 즉시 전액을 지급한다는 것, 둘째 연준이 새로운 긴급대출 프로그램을 시행해 은행들이 보유한 국채나 모기지채권을 시장가치가 아닌 액면가치로 인정해 그만큼 대출을 해준다는 것이다.


투자자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이달 들어 지난주 중반까지 미국 은행들의 주가는 2290억달러(17%) 하락했다. 국채 수익률은 폭락했다. 시장은 연방준비제도(연준)가 올해 여름 기준금리를 인하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유럽과 일본의 은행 주가도 급락했다. 크레디트스위스 주가는 3월 15일 24% 하락했고 결국 스위스중앙은행이 긴급 유동성 지원에 나섰다.

현재 상황은 미국 은행시스템에 대한 중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금융역사학자인 피터 콘티 브라운은 "이는 시장의 과잉반응이거나 또는 외부에 있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가 금융시스템 내에 존재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이를 알기 위해선 기준금리 변화가 은행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은행의 대차대조표에서 예금은 부채고 대출은 자산이다. 금리가 제로에 가까웠던 2022년 초 미국 전체 은행들은 24조달러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약 3조4000억달러는 예금자에게 상환할 수 있는 현금이었다. 약 6조달러가 주로 국채나 모기지담보부채권 등 유가증권이었다. 나머지 11조2000억달러는 대출이었다.

미국 은행들은 19조달러에 달하는 방대한 예금 자산을 갖고 있다. 이 가운데 약 절반은 미국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의 보험에 가입돼 있고 절반은 그렇지 않았다. 은행들의 자기자본은 약 2조달러였다.

그 후 미국 기준금리가 0~0.25%에서 4.5~4.75%로 4.5%p 급등했다. SVB 파산이 주목을 끈 이유는 기준금리 상승으로 은행의 자산 포트폴리오 가치가 하락했다는 사실, 그같은 타격이 대차대조표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FDIC에 따르면 시가평가에 따른 미국 은행들의 미실현 손실이 총 6200억달러에 달한다. 6조달러에 달하는 은행 채권 포트폴리오에 총 10%의 손실이 발생할 경우 은행 자기자본의 1/4 이상이 사라지게 된다. 1년 전에는 미국 금융시스템 내 자본이 충분했을지 모르지만, 이 자본의 상당부분이 금리상승으로 사라졌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에리카 장 조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자산가치 변동을 따져봤다. 연구팀은 높아진 금리에 맞춰 은행 자산을 조정할 경우 문제가 심각해진다고 지적했다. 이자율이 2%인 10년만기 채권과 고정이자율이 2%인 10년만기 대출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는 없다. 채권가치가 15% 하락했다면 대출로 인한 손해가 그만큼 늘었다고 볼 수 있다.

연구팀은 "이를 고려하면 미국 은행 자산의 가치는 장부상보다 2조달러 낮다"며 "미국 은행이 보유한 모든 자본을 전멸시킬 수 있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연구팀은 또 다양한 저비용성 예금에 대한 재평가도 시급하다고 봤다. 예를 들어 대출 조건으로 받는 구속성예금(이른바 꺾기)이나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당좌예금 등이 은행 입장에서 1년 전에 비해 무척 소중해졌다는 점이다. 또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10년만기 할인채 가격이 지난해 초 대비 20% 가까이 하락했다. 은행의 자본조달 비용이 커진 것이다.

결국 은행의 실제 위험은 예금자의 행동에 따라 달라진다. 금리가 상승하면 고객들은 현금을 머니마켓펀드(MMF)나 고수익예금 계좌로 옮길 수 있다. 고액이면서 인출 가능성이 낮은 저비용성 예금을 보유한 은행들은 자산의 시장가치에 대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반면 인출 가능성이 높은 예금을 보유한 은행들은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다. 에리카 장 연구팀에 따르면, 예금자보호법 대상이 아닌 예금의 절반이 인출될 경우 자산과 자기자본으로 해결할 수 없는 미국 은행이 190개에 달한다.

연준의 자금지원 프로그램에 따라 은행들은 보유한 증권의 액면가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일부 장기채권의 경우 시장가치보다 50% 이상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도 있다. 이를 고려할 때 은행 채권의 미실현손실로 은행이 파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즉 향후 은행들이 예금자의 인출 요청을 처리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이기에 예금자들이 도망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한식에 죽나 청명에 죽나'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연준의 새로운 대출 프로그램 금리는 시장금리 4.5%와 비슷한 수준이다. 즉 은행이 자산에서 벌어들이는 이자수익이 그 이하로 떨어지고 저비용성 예금이 이탈할 경우, 은행은 뱅크런으로 인한 빠른 죽음이 아니라 분기별 순이자마진 손실로 서서히 죽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는 바로 대형 자산운용사 블랙록 회장 래리 핑크가 경고한 '서서히 진행되는 위기'(slow-rolling crisis)다. 핑크 회장은 "은행들과 관련해 더 많은 압류와 폐쇄가 발생할 것"이라며 "기준금리가 오르면서 은행들의 자산-부채 불일치 상황이 드러나고 있다. 결국 SVB가 파산했다. 지난 수십년 동안 값싼 돈을 누렸던 대가를 이제야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

펜실베이니아대 콘티 브라운은 현재 상황을 1980년대 연준 폴 볼커 의장이 기준금리를 급격히 인상하면서 발생한 은행부실 사태에 비유한다. 그는 "금리가 상승하면 자산가치가 어떻게 떨어지는지 시장이 실시간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은행의 채권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먼저 문제가 드러난다. 하지만 연준의 금리정책 변화시 위험을 수반하는 자산은 채권에 그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1980년대에 가장 먼저 파산한 은행들은 기준금리 상승으로 자산가치가 하락한 곳이었지만, 위기는 결국 우리나라의 상호저축은행에 해당하는 '저축대부조합'으로 옮아갔다. 현 상황을 비관하는 측에선 SVB 파산이 연이은 도미노의 첫번째 붕괴에 불과하다고 본다.

예금자보호법 대상이 아닌 예금을 많이 갖고 있는 소규모 은행들은 신속히 자본을 조달해야 한다. 사모펀드기업 '아폴로'의 이코노미스트 토르스텐 슬로크는 "미국 은행시스템이 보유한 총자산의 1/3이 SVB보다 규모가 작은 은행들이 갖고 있다"며 "이들 은행은 이제 재무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대출을 억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JP모간체이스나 뱅크오브아메리카와 같은 대형은행들은 고객이 고정적이라 변동금리 대출로 금리가 상승하면 수익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총자산 10조5000억달러에 달하는 약 4700개의 중소형 은행들은 예금인출을 막기 위해 예금자에게 더 많은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이는 은행 마진에 큰 타격을 준다.

그동안 SVB처럼 규모가 큰 은행들은 '대마불사'(too big to fail)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같은 생각은 뒤집혔다. 헤지펀드 '시타델'의 엔젤 유비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투자자들은 예금은 안전하고 시장에서의 자금조달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또 국채는 안전하고 대출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며 "투자자들은 이를 기반으로 행동했다. 하지만 현재 그 모든 것이 정반대가 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UBS(스위스 1위 은행), CS(크레디트스위스) 인수 … 급한 불 껐지만 '불안'
"내 돈 안전한가" 미국 진풍경
[이번 주 증시 전망] 은행파산 리스크 여진 … 연준 금리인상 주목
SVB·CS 급한 불 껐지만 "투자 심리 위축 불가피"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김은광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