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메이지유신

2023-12-01 12:02:31 게재
김상준 경희대 교수, '붕새의 날개, 문명의 진로' 저자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이제 82세가 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내놓은 새 애니메이션의 제목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포근한 감동을 주는 그의 작품들을 어릴 적부터 보면서 자랐을 것이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보기 좋은 영화고, 필자 역시 아이가 아주 어릴 적부터 함께 봐왔다.

대부분의 그의 작품이 생태주의 반전사상 등의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가르치듯 앞세운다는 느낌은 없었다. 유려한 영상과 판타지 속에 메시지는 보이지 않게 녹아있다. 그러나 이번엔 제목부터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이런 식의 고풍스런 훈계조 언어가 어색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 이미 익숙한 20~30대 젊은이들이 주로 영화관을 찾고 있다. 이들은 '그래도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이니까'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제목도 기꺼이 감수하면서 상영관을 찾았을 것이다.

그런 젊은이들이 올린 것으로 보이는 인터넷 영화평들을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십중팔구가 당혹스럽다는 반응이다. 그런데 어떻게 살라는 거죠? 뭐가 포인트죠? 기대 많이 했는데 너무 난해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지루하다' '뜬구름 잡듯 추상적이다'는 혹평으로 이어진다. 열에 한둘 '역시 걸작'이라는 평도 있지만 그들 역시 왜 걸작이라는 것인지 딱 잡아 말하지 못한다. '역시 뛰어난 영상미' '지금까지 작품의 총망라' 정도다. 미야자키의 작품이니까 그냥 '역시'라고 말한다는 느낌. 이래저래 궁금해져 집 근처 상영관을 찾았다. 재미있게 보았다. 젊은이들이 왜 포인트를 잡기 어렵다고 하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 근대의 뿌리를 다시 묻겠다는 의도

아주 큰 주제를 던진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 주제는 감춰져 있다. 큰 흐름이 안 보이면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것인지 어려울 수도 있다. 아마 일본 밖의 대부분의 관객들에게는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일본에서는 상영관 흥행 기록 압도적 1위인 2001년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이어 역대 2위를 기록 중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대단한 성공이다. 이 작품이 '센과 치히로의…'가 그랬던 것처럼 일본인들의 집단무의식을 건드려 놓은 것이 분명하다.

이 영화의 모든 이야기는 '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이 탑이 무엇인지 주목해야 한다. 이 탑의 정체는 영화 중간쯤에 한 노파가 흘리듯 던져 놓는 말에서 드러난다. 이 탑은 '메이지유신 얼마 전에'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검은 돌덩어리였다고. 호수 하나를 말려버릴 만큼 거대한 폭발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핵심 미스터리 인물인 '큰할아버지'가 이 거대한 돌덩어리가 매우 귀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거대한 돌을 덮는 높은 탑 형태의 건물을 지었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 그 '큰할아버지'의 몇대 손자쯤 되는 영화의 소년 주인공 마히토(眞人)가 그 탑에 들어가 겪게 되는 기이한 일들이 스토리의 중심이다. 환상적 에피소드 끝에 그 거대한 탑은 무너진다.

이렇게 보면 작품 서사의 핵심축은 간단하다. 신비하고 거대한 탑이 있었다. 그러나 그 탑은 무너졌다. 아주 의미심장하고 거대했던 무엇이 무너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대들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 또한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필자는 하늘에서 날아온 그 거대한 검은 돌덩이가 '메이지유신(1868년) 얼마 전에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대사에 놀랐다. 이 대사는 정신 나간 노파의 헛소리로 흘려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하게 '메이지유신 몇년 전'인 1853년 일본에 들이닥친 서양 흑선(쿠로후네), 즉 미 해군 페리 제독의 검은 증기선 네척을 말한다('흑선도래' 사건). 그리고 그 검은 돌 위에 씌운 거대한 탑이란 그 이후 벌어진 메이지유신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웬만한 기본 역사 교양을 갖춘 일본인이라면 절대 놓칠 수가 없는 사실들이다.

미야자키 감독이 영화의 끝에 이 거대한 탑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흑선도래'와 '메이지유신'을 뿌리로 하는 현대 일본인의 정체성을 뿌리로부터 다시 묻겠다는 것 아닌가? 탑은 무너졌다. 여러분, 특히 젊은이들이여,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 엄청나게 큰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반전과 생태·생명사상을 펼쳐왔던 감독이지만 이렇게 크고 본질적인 문제를 던질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일본인의 민감한 집단무의식을 자극

놀라움을 풀어줄 1차 단서는 이 작품의 제목에 있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일본에서 1937년 처음 나와 현재까지 80년 넘게 출판되고 있는 청소년 대상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한국에도 이미 번역된 이 책의 후기에서 저자인 요시노 겐자부로는 '제국 일본이 전쟁을 확대하며 군국주의화되어가는 흐름에 맞서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러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면서 이 책은 금서가 된다. 일본의 패전 이후에 다시 복간돼 오늘날까지 계속 출간되고 있다.

미야자키 감독은 1941년 생이다. 소년 시절 어머니가 이 책을 그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그러면 대략 1950년대다. 전후 일본은 군국주의 팽창주의의 과거 '제국 일본'을 반성했다. 미야자키 감독은 그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가 늘 반전평화사상을 펼쳤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젊은 시절부터 반전 평화 환경 생태주의에 관심이 컸다. 지브리 창립 이전 시절에는 근무처의 노동조합 서기(위원장)도 했다.

왜 영화 속의 탑이 무너지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기서 한 매듭 풀린다. 이미 그의 어린 시절 '제국 일본'이라는 거대한 탑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그때 이미 새로운 일본, 영화 속의 '큰할아버지'가 후손 마히토에게 말했던 "풍요롭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꿈을 미야자키 감독 역시 품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의문이 남는다. 여기까지는 미야자키 자신의, 그리고 자신의 세대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왜 이제 자신이 노년에 이른 2023년에 이르러서도 그 질문을 다시 던지는 것일까? 그것도 1930년대의 요시노 겐자부로보다 더욱 크고 근본적인 질문을? 1937년의 요시노는 중국에서 침략을 확장하고 있는, 만주를 점령하고 이어 국제연맹을 탈퇴했던 1932~1933년 무렵부터의 일본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2023년의 미야자키는 훨씬 더 근원으로 올라가 '흑선도래와 메이지유신'이라는, 현대일본의 거대한 뿌리 자체, 뿌리 전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고 말하고 있다. 과감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현대 일본인의 거대한 집단무의식을 건드리고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건드린 집단무의식이란 에도시대 일본에 대한 잊혀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일본인들에게는 달콤한 종류의 것이었다면, 이번 작품이 건드리는 무의식은 현대 일본인의 자부심과 자존심의 핵심에 해당하는 매우 민감한 집단무의식이다. 따라서 바로 그것을 건드렸다고 하는 사실 자체가 일본인들에게는 상당히 도발적일 수 있다. 그래서 '제국 일본'의 군국주의적 만행이 어설픈 앵무새 떼의 웃기는 망동 정도로 가볍게 처리되기도 한다.

번영과 평화, 아름다운 세계를 생각하길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제 80대의 노감독이다. 그가 던진 과감한 질문은 그가 젊을 적부터 품었을 질문이자, 이제 한 단계 더욱 높은 수준에서 새로운 세대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일본만 아니라 온세계의 젊은 세대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내려올 때 들려지는 주제곡이 '지구의를 돌리며'다. 젊은이들이여 크고 넓게 생각하라, 좁다란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지 마라. 넓은 세계를 생각하라. 넓은 세계의 번영과 평화와 아름다움을 생각하라. 자막이 다 내려올 때까지 앉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