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오염 개연성 증명하면 배상해야"

2024-01-24 11:09:46 게재

대법, 불산 유출 피해 1인당 700만원 확정 … "피해자 인과관계 증명부담 완화한 것"

환경오염 사건에서 직접 증명이 되지 않았더라도 유해 물질로 인해 피해가 발생할만한 개연성만 증명하면 가해 기업에 배상책임이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충남 금산군 지역 주민 A씨 등 19명이 반도체용 화학제품 제조업체인 A사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주민들에게 각 7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4일 밝혔다.

대법원은 "원심의 판결에는 환경오염피해구제법상 손해배상책임에 있어서 인과관계 인정과 증명책임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없다"며 A사의 상고를 기각했다.

A사는 2016년 6월 충남 금산군 내 공장에서 불화수소를 싣는 작업 도중 하역시설 내부로 2370㎏ 상당의 불산, 하역시설 외부로 약 444.6㎏ 내지 871.3㎏ 상당의 불산을 누출했다. 특히 누출된 불산이 증발해 약 33.04㎏ 상당의 불화수소가 기체 상태로 확산됐다. 이로 인해 인근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원고)이 기침, 가래, 수면장애, 소화장애, 기관지 불편, 두통, 안구통증 등을 호소하면서 인근 병원에서 진료와 치료를 받았다.

이에 원고들은 '환경오염피해 배상책임 및 구제에 관한 법률'에 따라 A사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심에서는 A사가 원고들에게 500만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는 기각했다. 재판부는 "원고 등이 이 사건 이후부터 집단적으로 수면장애, 불안장애 등을 호소하기 시작한 점을 고려하면 이 사고로 인한 신체적, 재산적 피해 우려, 유사한 사고 재발의 우려 등으로 인해 원고 등에게 장애가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며 "이 사건 공장이 정신적 손해 발생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볼 만한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A사의 항소로 진행된 2심에서는 손해배상금을 700만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공장에서 유출된 불산이 기체 상태로 공기 중으로 확산됐다가 지표면으로 낙하해 원고 등에게 피해를 입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며 "사고의 위험성, 피해 정도와 치료 노력, 정신적 고통 등을 고려하면 손해배상액을 700만원으로 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대법원도 A사의 상고를 기각하며 원심을 최종 확정했다.

대법원은 "환경오염피해구제법을 종합하면 환경오염 피해자가 손해배상 청구를 하는 경우 여러 간접사실을 통해 전체적으로 보아 배출된 오염물질로 인해 피해가 발생했다는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며 "이 때 해당 시설에서 배출된 오염물질 등이 피해자나 피해물건에 도달해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직접 증명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사건 공장에서 누출된 불산은 기체 상태로 공기 중으로 확산됐다가 지표면으로 낙하해 원고 등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볼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며 "달리 이 사건 사고와 원고 등에게 발생한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부정할 사정은 없다"고 판단했다. 피해를 뒷받침할 간접사실로는 시설의 가동과정과 설비, 투입·배출된 물질의 종류와 농도, 기상 조건, 피해 일시·장소, 피해의 양상과 그 밖에 피해발생에 영향을 준 사정 등을 꼽았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 사건은 환경오염피해구제법상 배상책임에서 인과관계가 쟁점이 된 첫 사건"이라며 "기존 선례는 환경침해로 인한 손해배상 사건에서 인과관계 인정을 위해 유해물질의 배출, 피해자에의 도달, 피해 발생 사실을 각각 증명할 것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 판결은 기존 선례에 비해 피해자의 인과관계 증명부담을 완화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전체적으로 보아 시설의 설치·운영과 관련하여 배출된 오염물질 등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생명·신체 및 재산에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볼 만한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하면 그 시설과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가 추정된다'는 법리를 처음으로 선언했다"고 의미부여했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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