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구성 변화, 판결에 영향 미칠까

2024-03-04 13:00:25 게재

엄상필·신숙희 신임 대법관 4일 취임

중도·보수 8명, 진보 5명으로 재편

전합 판결 진보 성향에 제동 걸릴 듯

엄상필·신숙희 신임 대법관이 업무를 시작하면서 중도·보수 성향의 대법관이 우위를 차지해 앞으로 전원합의체 판결에 영향을 미칠 지 주목된다.

윤석열 대통령, 신숙희, 엄상필 신임 대법관 임명 재가 대통령실은 지난달 29일 윤석열 대통령이 신숙희(오른쪽), 엄상필 신임 대법관 임명을 재가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4일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엄상필(사법연수원 23기)·신숙희(25기) 대법관은 이날 오전 취임식을 갖고 업무를 시작했다. 올해 1월 임기를 마친 안철상(중도)·민유숙(진보) 전 대법관의 뒤를 이어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신임 대법관으로 임명했다. 이들은 6년간 대법관직을 수행한다.

경남 진주 출신인 엄 대법관은 진주동명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97년 2월 서울지법 판사로 첫 근무를 시작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 요직을 거친 정통 법관으로 꼽힌다.

엄 대법관은 2021년 서울고법 부장판사 재직 당시 조 국 전 법무부 장관 부인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 항소심을 맡아 자녀 입시비리 관련 혐의를 모두 유죄로 판단해 징역 4년을 선고한 바 있다. 또한 이명박정부 시절 ‘민간인 댓글 부대’에 국가정보원 예산 63억원을 지원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파기환송심에서도 직권남용 혐의 등을 추가로 인정해 징역 9년을 선고했다.

서울 출신인 신 대법관은 창문여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1996년 서울지법 판사로 임관해 서울고법 판사와 수원고법 판사 등을 지냈다. 지난해엔 여성 최초로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으로 발탁돼 양형기준 대상 범죄군 확대 등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양형기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 대법관은 한국젠더법학회 부회장과 법원 내 ‘젠더법연구회’ 회장을 지내는 등 젠더법 분야 전문가로 꼽힌다. 2019년 서울고법 부장판사 재직 당시 ‘어금니 아빠’ 이영학 사건에 대한 경찰의 부실한 초동 대응으로 피해자가 사망했다며 1심보다 국가 책임을 무겁게 보고 손해배상금을 증액하는 판결을 선고했다.

두 신임 대법관의 판결 성향은 ‘중도’로 분류된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법원행정처장 제외)으로 이뤄지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두 대법관이 취임하면서 ‘중도·보수’ 대 ‘진보’ 비율이 ‘7대 6’에서 ‘8대 5’로 바뀌었다. 전원합의체는 주요 사건에 대한 판결 확정, 기존 판례 변경 등을 통해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 시절에는 전원합의체가 진보 우위로 구성돼 있었다면, 윤석열정부에서 조희대 대법원장과 오석준·서경환·권영준·엄상필·신숙희 대법관이 임명되면서 전원합의체가 중도·보수 성향 대법관이 우위로 바뀌었다.

앞으로 각 분야의 굵직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주목을 받는 이유다.

특히 산업계에선 전원합의체의 지형 변화가 대법원에 계류 중인 굵직한 노동 사건 선고에 미칠 영향에 주목하고 있다. 수년째 결론을 내리지 못한 사건 선고 결과가 하급심과 사회에 미치는 파장이 크기 때문이다. 금속노조가 “원청(현대중공업)에 대한 하청노조의 단체교섭권을 인정해달라”며 낸 소송이 대표적이다. 1·2심은 회사가 승소했지만 대법원에서 4년 8개월째 계류 중이다. 이 사건의 결론은 대리점 택배 운전사 노조의 단체교섭권 인정 여부를 다투는 CJ대한통운 사건 상고심 등 다른 사건 판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노동·산업계가 예의주시하고 있다.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여부를 판단할 때 ‘재직자 조건’을 다는 게 맞는지를 따지는 세아베스틸 사건 역시 전원합의체에 계류 중이다. 경영성과급의 평균 임금 인정을 두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근로자들과 벌이는 퇴직금 청구 소송도 연내 전원합의체에 회부될 가능성이 높다.

노동 사건이 대법관의 성향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대표적인 영역이어서 더욱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진보 성향 대법관이 과반을 차지한 김명수 전 대법원장 재임 기간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판결이 많았던 것과 비교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5월 전원합의체는 “사용자가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할 때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 과반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새로운 판례를 내놓으면서 45년간 통용된 ‘사회 통념상 합리성’ 판례를 뒤집었다.

전원합의체 판결은 아니지만 대법원이 지난해 6월 “불법파업에 참여한 노조원에게 기업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는 조합원별로 책임 정도를 개별 판단해야 한다”고 판결하면서 경영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이런 판결 흐름은 중도 보수 성향 대법관이 잇따라 임명되면서 변화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도·보수 성향은 조희대 대법원장과 이동원 노태악 오석준 서경환 권영준 엄상필 신숙희 대법관 등 8명, 진보 성향은 김선수 노정희 김상환 이흥구 오경미 대법관 등 5명이다.

여기에 올 8월에 이동원 대법관과 함께 진보 성향인 김선수 노정희 대법관이, 올 12월에 진보 성향인 김상환 대법관이 임기 만료로 퇴임할 예정이라 전원합의체의 중도·보수 성향은 더욱 짙어질 전망이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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