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동남아에서 존재감 떨어지고 있는 한국

2024-04-05 13:00:02 게재

동남아 언론에서 한국에 관한 뉴스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마저도 연예인 자살, 의료계 파업,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 부정적인 뉴스가 태반이다. 이러한 보도 경향은 한국-아세안 관계가 뒷걸음질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첫째, 한-아세안 정상외교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년간 국제회의 개최지 두 나라를 포함해 아세안 10개국 중 3개국을 방문했다. 미국을 5차례, 유럽을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중국은 방문하지 않았다. 아세안 정상 중 지난해 방한한 이는 한명도 없다. 미국 위주의 ‘가치외교’ 성향이자 결과다.

둘째, 한-아세안 경제교류가 정체상태다. 아세안은 미국 중국과 함께 우리 경제의 3대 파트너이지만 인적교류와 건설진출이 크게 감소했다. 우리 기업들이 미국 다음으로 선호하던 투자(FDI) 지역인 아세안에 대한 투자도 제자리걸음이다. 무역만 유일하게 상승했다. 이는 대중국 무역의 퇴조를 아세안에서 만회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건설 진출 부진이 특히 안타깝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상징적인 건물이 한국업체에 의해 건설됐고 아세안 건설 수주 규모가 한때 중동을 추월하기도 했다. 곳곳에 한국업체의 건설현장이 눈에 띄었으나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우리 건설업체가 중국기업에 밀리고 현지 정부 발주 사업을 따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아세안 인적교류 규모는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비해 30%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인적교류의 확대보다 불법체류 단속에 더욱 관심을 쏟고 있다.<내일신문 2023년 12월 22일자 ‘다시 가고 싶지 않은 나라’ 참조>

미국 위주 가치외교의 역효과

셋째, 동남아 사람들은 한국의 한류, 민주화, 깨끗한 정부를 무척 부러워했다. 일본과 중국과 다른 특성의 한류는 2000년대 초부터 동남아를 휩쓸었다. 전직 대통령들이 재판을 받거나 총리가 어느 지방에 홍수가 났을 때 골프를 쳤다는 이유로 사직했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인도네시아정부가 동아시아 30여개국의 부패 현황을 조사한 결과 한국이 가장 깨끗하다는 결론을 냈다.

이와 같이 10여년 전 한국 존재감은 두드러졌고 동남아 언론에는 한국에 관한 긍정적 뉴스가 태반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미중경쟁 속에서 가치외교 기치를 내세우면서 이 지역에 쌓아둔 한국의 매력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한국 일본 호주는 5년마다 자국에서 아세안과 특별정상회의를 열었다. 최근 아세안 정상들은 일본 호주회의에 참석했으나 한국회의에 대해 흥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부산 엑스포에 대한 아세안의 지지도 낮았다.

미국 일본 중국의 대 아세안 투자가 계속 크게 늘어나고 아세안 경제는 금년 4.5~5% 성장전망이다. 미국과 중국 국가 수반이 지난해 경쟁적으로 아세안을 방문했고 중소 국가의 영향력이 커지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제3세계) 추세에서 아세안의 국제적 비중이 커지고 있다.

한국은 아세안 관계를 조속히 복원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은 무엇보다 실용외교로 돌아서서 아세안과의 정상외교를 복원해야 한다. 정치든 경제든 국책사업의 경우 정부의 열정에 따라 성패가 바뀐다는 사실을 필자는 여러차례 목격했다. 2006년 12월 우리 대통령이 인도네시아와의 정상회담에서 열정적으로 한국형 잠수함에 관해 제조 기술을 공유하거나 현지 생산도 가능하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러시아 제품이 가격과 금융조건에서 한국보다 유리했지만 인도네시아 해군 장성들이 기술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강력히 선호해 결국 한국이 수주했다. 포항제철이 제선 제강 압연공정을 모두 갖춘 제철소를 인도네시아에 건설한 것도 정부의 추진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이 먼저 아세안과 반도체 협력 강화를

다음, 아세안과의 공통과제를 선정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아세안은 디지털경제와 반도체산업 육성에 온힘을 쏟고 있다. 한국이 강점을 가지고 있는 분야다. 더욱이 한·일·대만·아세안 사이 반도체 투자와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반도체 회랑(corridor)이 형성되고 있다. 한국은 먼저 아세안과 반도체 협력을 강화하고 한국-아세안 주도로 지역(regional) 협력체의 설립방안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지난해 북한도발을 겨냥해 아세안에게 안보협력을 제안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대아세안 정책이 실용외교 아래서 재정비되기를 기대한다.

이선진 전 주 인도네시아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