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의사 존중했다 2차 피해 빈발

2016-07-26 10:37:55 게재

극단상황 치닫기도 …

"실무 현장에서 혼란 불러"

구속영장이 두 차례 법원에서 기각된 후 집으로 돌아온 폭력남편에게 최근 살해당한 50대 부인은 생전에 "남편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수년 동안 이어진 남편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찰에게 "내가 맞을 만해서 맞았다"고 말하곤 했다.

지난달에는 제주에서 결혼을 약속한 동거남의 상습 가정폭력으로 살해당한 40대 여성 역시 애초 사건이 경찰에 접수됐을 때 "술만 마시지 않으면 괜찮다"며 처벌불원 의사를 밝혔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지 않아 이 여성은 술에 취해 들어온 동거남에게 가슴과 복부를 발로 차여 3시간여 복통을 호소하다 숨졌다.

이 두 가지 사례는 피해자 의사를 존중한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을 폭력상황에 방치할 경우 언제라도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가정폭력 전문가나 실무자들이 가정폭력처벌특례법상 피해자 의사 존중 원칙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가정폭력 사건을 다뤄본 실무자들은 설령 극단까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피해자 의사 존중 원칙이 2차 피해를 부르는 일이 잦다고 지적한다.

피해자 의사 존중 원칙은 가정폭력특례법 9조에 명시돼 있다. 이 법 9조는 상담소나 보호시설의 장은 피해자 등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 보호조치를 취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다. 법조문상으로는 상담소나 보호시설의 장에게만 국한돼 있지만 실제로는 가정폭력을 다루는 모든 공권력기관에서 이 원칙을 적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현행법상 가정폭력 사건은 형사사건으로 다룰지, 가정보호사건으로 할지, 또는 상담을 받는 조건으로 기소유예를 할지 검사들이 결정할 수 있는데 이때 피해자 의사 존중 원칙이 들어간다. 명백한 폭력범죄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의사에 따른다는 명목으로 검사가 재량권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박소현 한국가정법률연구소 박사는 "단순폭행이 아닌 상해를 입힌 경우에는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공권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빠져나가는 범죄들이 많이 있다"면서 "피해자는 배우자를 처벌할 경우 생길 수 있는 경제적 문제나 부부관계 문제 등 때문에 가해자에 대한 처벌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히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공권력이 제재를 가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피해자 의사 존중 원칙은 가정폭력 사건을 다루는 실무자들에게 오히려 혼선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가정폭력 관련 연구에 참여한 한 경찰관은 "(남편에게 맞아 임시조치 신청한 피해자에게) 임시조치 신청을 하셨는데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피해자 의사를 묻는데 그 사이에 마음이 바뀌는 여자들이 50% 이상"이라면서 "화가 나서 남편을 신고했지만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하다 보면 화해가 되는 경우인데,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경찰이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처벌도 못하고 가정폭력법이 유명무실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피해자가 밝힌 의사를 과연 진정한 의미의 의사로 받아들여 존중할 수 있느냐의 문제도 논란이 될 수 있다. 오랜 학대에 시달려 이미 체념상태에 빠진 피해자의 경우에는 폭력의 노예화, 학습된 무기력 증후군 탓에 '의사결정장애'를 겪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표면적으로 밝히는 의사를 기계적으로 반영할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진정한 의사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김은경 박소현 박사 등은 공동논문에서 "현행처럼 피해자 의사를 기계적으로 파악해 존중하는 방식은 사법적 처리과정이 불안한 심리의 피해자 변덕에 좌우돼 무원칙하고 형평성 없는 대응이 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맞고 산다는 것 자체로 자존심이 손상되고, 가해자가 더 심한 폭력으로 보복할까봐 공포심에 사로잡힌 피해자의 심리특성을 보더라도 외부개입이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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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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