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길 먼 투자자 권리보호│③ 빼앗긴 주주 지위

합병과정에서 주주권리 상실 … '눈뜨고 당해'

2017-06-01 10:55:35 게재

헐값매각 이의제기 '주주대표소송' 막혀 … 경영상 목적이라며 '소액주주 축출'도

미국 렉싱턴사의 주주들은 1985년 회사의 임원과 이사들이 500만달러 규모의 불량 내지 사기적 대출을 함으로써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며 손해배상책임을 묻는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했다. 주주대표소송은 경영진의 행위가 주주 이익과 어긋날 경우 주주가 회사를 대표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 경영진을 상대로 제기하는 소송이며 손해배상금은 전액 회사에 귀속된다.


하지만 이후 렉싱턴사가 콜로니얼사에 흡수합병되면서 렉싱턴 주주들의 주식은 콜로니얼 주식으로 교환됐다. 렉싱턴 주주들은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한 상태에서 주식이 없어진 것이다. 회사는 원고들이 주주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소송자격(원고적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사건을 맡은 미국 알리바마 대법원은 1989년 주주지위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주주들이 원해서 이뤄진 주식교환이 아니기 때문에 '원고적격을 유지해야 한다'는 예외를 인정해 준 것이다.

알리바마 대법원은 "강제적으로 주주지위를 박탈당한 원고들의 원고적격을 부정한다면, 주주대표소송 자체를 단지 다른 법인과의 합병을 통해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야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법조협회는 이같은 판례를 정리해 "주주지위 상실이 주주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닌 회사의 행위의 결과이고, 대표소송이 주주의 지위를 상실시키는 행위에 앞서 제기된 경우에는 그 예외를 인정한다"는 규정을 정했다.

'원고적격 상실' 현대증권 소액주주들 = 렉싱턴사와 유사한 사건이 국내에도 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지난해 현대증권 주주들은 윤경은 당시 회사대표(현 KB증권 대표) 등 이사 5명이 회사 자사주를 KB금융지주에 헐값매각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며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후 KB금융지주와 현대증권의 포괄적 주식교환계약으로 현대증권 소액주주들은 주식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됐다. 서울남부지법은 지난 4월 주식교환에 따라 더 이상 현대증권 주주가 아니라며 주주대표소송을 '각하'했다. 항소를 고민하던 주주들은 지난달 23일 서울고법에 항소했다.

이 사건이 갖는 상징성은 크다. 유사한 사례가 잇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려는 상황에서 자회사의 자사주를 저가에 매입한 뒤 소액주주들이 이를 문제 삼으면 주식교환계약을 통해 주주지위를 박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희활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국에서는 모회사의 주주들이 자회사의 경영을 견제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며 "국내에서 현재 논의 중인 다중대표소송제도가 도입되면 이런 상황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다중대표소송제는 모회사의 주주가 자회사 또는 손자회사 임원들의 불법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소송을 낼 수 있는 제도다. 문재인 대통령은 다중대표소송제 도입을 공약으로 제시했고 현재 국회에 관련 법률안이 계류 중이다. 현재 다중대표소송제가 도입돼 있다면 현대증권 소액주주들은 원고적격을 놓고 다툴 필요 없이 자사주 헐값매각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동양증권 헐값 매각" 주장 투자자 패소 = 동양사태로 동양증권이 대만의 유안타 증권으로 넘어갈 때 소액주주들은 헐값매각이라며 신주발행무효소송을 내는 등 반발했다.

하지만 올 1월 대법원 판결로 패소가 확정되면서 소액주주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13년 법정관리에 들어간 동양인터내셔널과 동양레저는 동양증권 주식을 각각 14.93%, 12.13% 보유하고 있었다. 회사의 공동관리인은 2014년 3월 주식을 유안타 아시아에 매각하는 주식양수도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앞서 동양증권이 이사회를 열고 유안타 아시아에 제3자 유상증자 방식으로 보통주 7140만주(액면가 5000원)를주당 2100원에 넘기기로 했다. 구주와 신주 인수로 유안타 아시아는 동양증권 지분을 50% 이상 확보했다.

소액주주들은 "신주발행이 재무구조개선 등의 경영상 목적이 아니라 경영권을 저가에 유안타 아시아에 넘기기 위해 이뤄진 것으로 상법과 회사 정관이 규정하고 있는 제3자 배정 방식 신주 발행의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신주발행 당시인 2014년 1월 주당 가격은 2500원 안팎이었지만 신주발행 가격이 2100원으로 결정된 다음날 주가는 10% 가량 하락했다. 소액주주들은 "신주 발행가액이 회사의 자산가치 기업가치 경영권 프리미엄 등이 반영되지 않은 현저히 낮은 가액으로서 기준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불공정한 신주 발행에 해당한다"고 반발했다. 이대순 변호사는 "신주의 헐값발행으로 회사의 가치가 하락해 주주들이 피해를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원은 "신주발행 가격이 자본시장법령상의 최저발행가액 하한인 1805원을 상회하고 있다"며 "경영권 프리미엄 등을 반영하지 않은 저가라는 주장을 인정할만한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이 변호사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삼성물산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입은 것과 비슷한 사건이지만 배상을 받을 길이 없다"고 말했다.

소액주주 축출제도 남용 우려 = 회사 지분의 95%를 보유한 지배주주가 소액주주들을 축출할 수 있도록 만든 상법의 '지배주주에 의한 소수주식 전부취득 제도'의 남용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삼성자산운용 소액주주들은 2014년 '경영상의 목적'이라는 이유로 지분을 강제로 지배주주에게 매각하고 주주지위를 상실했다. 삼성자산운용은 당초 삼성증권이 최대주주고 2대주주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었다. 하지만 삼성그룹은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한 금융계열사의 지배구조 개편을 위해 삼성자산운용 지분을 삼성생명에 몰아줬다. 2014년 7월 삼성생명은 삼성자산운용의 지분 96.27%를 보유한 지배주주가 됐다. 삼성생명은 임시주총을 열고 일부 소액주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당 2만2369원에 소액주주들의 주식을 강제 취득했다.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했기 때문에 법조항을 엄격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강제취득 조항의 적용은 '경영상의 목적 달성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한다.

소액주주의 주주권 남용으로 회사 경영이 곤란한 경우로 제한하거나 강제취득가격이 주주들에게 불공정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소액주주들은 금융업종에 대한 평가시 주로 활용되는 배당할인모형에 따라 삼성자산운용의 가치를 주당 3만4747원에서 3만7570원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소액주주들은 삼성자산운용으로부터 높은 배당을 받았는데 삼성생명이 주식을 강제취득했고 그 이익을 독점하는 구조가 됐다.

소액주주들은 '주주총회결의무효확인', '주식매매가격결정' 등의 소송을 제기했지만 모두 패소했다. 삼성자산운용 사건은 '지배주주에 의한 소수주식 전부취득 제도'가 2012년 도입되고 첫 적용된 사례다. 김주영 변호사는 "이번 사건으로 지배주주가 소액주주들을 손쉽게 축출할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고 말했다.

성 교수는 "회사의 이사를 선임할 때 선임되는 이사 수만큼 주주들에게 의결권을 부여하는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소액주주들이 대주주의 전횡을 견제할 수 있는 이사를 선임할 수 있다"며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사가 있다고 해서 회사 경영에 어려움이 있다는 재계의 주장은 그동안 이사회가 일치된 의견만 냈다는 반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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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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