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제조사 책임 첫 인정

2023-11-09 11:18:44 게재

대법원, 질병본부와 달리 옥시살균제 사용과 질환 인과관계 인정

가습기살규제 3등급 피해자에 대해서 손해배상을 인정하는 첫 대법원 판결이 나와 피해자 배상범위가 확대될 전망이다. 제품 사용과 폐질환 발병 사이 인과관계가 낮다는 이유로 정부 지원 대상에서도 제외된 3등급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길이 열린 것이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9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김 모씨가 가습기 제조·판매 업체인 옥시레킷벤키저와 한빛화학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상고심에서 위자료 5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씨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옥시와 한빛화학이 제조·판매한 가습기살균제 '옥시싹삭 뉴(new) 가습기당번'을 사용했다. 2010년 5월 폐질환 진단을 받았다. 갈수록 병세가 더 악화되면서 2013년 5월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원인 불명의 간질성 폐질환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2014년 3월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질환 가능성이 작다'는 이유로 폐손상 3등급 판정을 받았다. 3등급 피해자는 1·2등급과 달리 정부 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지난 8월 31일 서울역 앞 계단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참사 12주기 캠페인 및 기자회견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들의 유품이 놓여있다. 이날은 가습기 살균제의 위험에 대한 발표가 있은 지 11년이 되는 날이다. 가습기 살균제 위해에 대해 첫 발표를 한 환경보건시민센터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그동안 정부에 신청된 피해자는 7768명, 피해가 인정된 사람은 4350명, 사망자는 1784명이다. 피해 인정자 중 88.3%인 3842명은 가습기 살균제를 생산한 옥시나 애경 등 생산기업에 배상을 받지 못한 상태다. 연합뉴스


재심사에서도 같은 결과를 통보받은 김씨는 2015년 법원에 옥시와 한빛화학을 상대로 2000만원(2심 3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질병관리본부는 가습기 살균제 사용 후 원인 미상의 중증 폐질환 환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역학조사를 벌인 결과 가습기 살균제가 정상 폐세포에 독성 반응을 나타내며 폐섬유화를 유발할 수 있는 활성산소를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확인, 2011년 11월 수거를 명령했다.

이후 질병관리본부는 폐손상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돼 건강 손상이 발생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들에 대한 임상판정과 환경조사를 진행했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질환 발생 여부 판정 결과는 '가능성 거의 확실함(1등급)', '가능성 높음(2등급)', '가능성 낮음(3등급)', '가능성 거의 없음(4등급)', '판단 불가능'으로 나눠졌다.

3등급은 가습기 살균제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나, 폐 질환의 전체적인 진행경과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질환일 가능성이 낮다는 의미다.

1심에서 패소한 김씨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공동대리인단 도움을 받아 항소했다. 지난 2018년 5월부터 특별구제계정을 통해 월 97만여원을 지급받고 있지만, 10년 넘게 쌓인 병원비는 손해배상 청구 금액 3000만원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옥시 쪽은 3등급 판정을 이유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1심을 뒤집고 가습기 살균제 제품 설계나 표시에 하자가 있었고, 그로 인해 김씨가 폐질환을 입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제조물 책임법(제3·5조)에 따라 "김씨가 하자가 있는 가습기 살균제 제품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용했음에도 신체에 손상을 입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며 "그럼에도 옥시와 한빛화학이 김씨의 질병이 가습기 살균제가 아닌 다른 원인으로 발생했다는 점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어 "김씨를 비롯한 사용자들은 '인체에 무해하다'는 제품상 표시를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판결했다. 다만 3등급 판정을 받은 점과 구제 급여 대상자로 인정돼 매월 일정액의 급여를 지급받게 된 점 등을 종합해 위자료 액수는 500만원으로 제한했다.

대법원도 원심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대법원 관계자는 "가습기살균제 사용자가 그 제조·판매업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구한 민사소송 중 첫 상고심 사건 판결"이라며 "원고가 '가능성 낮음'(3단계) 판정을 받은 질병관리본부 조사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말단기관지 부위 중심 폐질환 가능성을 판정한 것일 뿐이고, 손해배상소송에서 가습기살균제 사용과 그로 인한 질환의 발생·악화에 관한 인과관계 유무 판단은 가습기살균제 사용자의 구체적인 증명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전제로 한 판결"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판결은 법원이 3등급 피해자의 인과관계를 인정해 기업이 손해배상 해야 한다고 본 첫번째 판결로, 3등급 피해자에 대한 기업의 배상 책임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의미가 있다. 피해자 지원은 정부 자원의 구제급여(1·2등급)와 기업분담금 자원의 특별구제계정(3·4등급)으로 나뉘어 있다. 정부가 피해를 인정한 1·2등급 피해자와 달리, 3·4등급 피해자는 정부 판정이 빌미가 돼 배상받기 어렵다는 문제가 제기돼왔다.

한편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직 임원들은 2심 판결을 앞두고 있다.

검찰은 10월 26일 서울고법 형사5부(서승렬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등의 2심 결심 공판에서 이들에게 각각 금고 5년을 구형했다. 함께 기소된 애경산업·SK케미칼·이마트 관계자 등 11명에게도 금고 3∼5년을 선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검찰은 "사람의 생명과 신체에 최고 가치를 두는 현대 사회에서 결함 있는 물건을 제조·판매해 막대한 이윤을 얻은 기업과 임원의 부주의로 많은 생명이 희생됐다면 막중한 법적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홍 전 대표 등은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 성분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하는 데 관여한 혐의(업무상 과실치사 등)로 기소됐다.

1심 재판부는 CMIT·MIT가 폐 질환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 성분들이 폐 질환과 천식에 영향을 준다고 결론 내린 보고서는 없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었다. 검찰은 2심에서 CMIT·MIT가 폐에 도달해 폐 질환을 일으킬 수 있음을 입증한 국립환경과학원 연구보고서를 제출했고, 재판부는 이를 증거로 채택했다. 지난해 12월 발표된 이 연구 결과에는 CMIT·MIT에 방사성 동위원소를 합성해 쥐의 코에 노출한 뒤 추적한 결과 5분 뒤 폐와 간, 심장 등에서 CMIT·MIT가 확인됐다는 내용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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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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