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한동훈 비대위의 성공조건

2023-12-29 00:00:01 게재

우여곡절 끝에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평생 검사만 한 초보정치인 윤 대통령의 '검사스러운 정치'가 만든 위기를 또다시 평생 검사 출신 정치초년생에게 맡겨 넘기겠다는 여권의 군색스러운 선택이다. '모 아니면 도'의 요행수에 기대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여권의 처지가 조금 안쓰럽기까지 하다.

범보수진영은 한 위원장을 '이순신'으로 추켜세우며 12척 국민의힘으로 거대 민주당 함대를 쳐부수길 기대한다. 그가 이순신이 될지 원균이 될지는 조금 더 지켜볼 일이다.

'2024년판 노태우 모델'은 성립 가능할까

한 위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이재명과 운동권 때리기'에 나섰다. 총선의 정권심판 구도를 '검사 대 피의자' '혁신 대 기득권' 프레임으로 바꿔보겠다는 나름의 계산인 듯하다. 여기에 자신이 나서야할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알리바이도 필요했겠다.

그런데 한동훈 비대위가 지금 총선판을 무겁게 짓누르는 정권심판론의 짙은 구름을 걷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당장 한 위원장 앞에는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라는 '킬러문항'이 놓여 있다. 여기에 이준석 신당과 보수분열, 당내 세대교체 등 준킬러문항도 산재해 있다. 과연 한 위원장은 이 문항들을 풀고 합격점을 받을 수 있을까.

한동훈호 성공이라는 측면에서 일단 떠올려 볼 수 있는 시나리오는 '노태우 모델'이다. 말하자면 전두환을 밟고 노태우가 주역으로 등장한 6.29선언의 '2024버전'이다. 1987년 박종철 사망사건과 4.13 호헌조치 후 거세게 타올랐던 전국 시민들의 저항에 직면해 당시 집권세력은 나름의 반전을 모색한다. 전두환이 "나를 밟고 가라"며 밑그림을 그렸고,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결단의 모양새를 취했다. '노태우 모델'은 그해 말 대선승리로 성공의 역사를 썼다.

2024년판 노태우 모델의 주인공은 당연히 한 위원장이다. 구체적으로는 한 위원장이 용산과 각을 세우는 것이다. 용산이 버티는 상황에서 한 위원장의 결단을 통해 '김건희 특검법' 등에 대한 양보를 받아내는 모양새라면 더욱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될 것이다. 이준석 신당 문제도 이 시나리오 안에서 수용 가능하다. 딴살림을 차린 이 전 대표와 다시 손잡는 범보수 빅텐트 그림이다. 지금 숨가쁘게 진행되는 여권 내부 흐름들이 이런 시나리오에 기반하고 있다면 상당한 파괴력을 가질 것 같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별로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지금 용산이 한동훈 비대위를 일종의 직할부대로 여기는 것 같아서다. 특히 김건희 특검법에 대해 용산은 어떤 타협도 없다며 완강한 입장이다. 비대위 출범 전 용산이 내세운 위원장의 조건도 '특검법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 위원장이 특검법에 대해 "총선용"이라고 날을 세운 것도 아마 용산과의 교감 결과일 것이다.

사실 노태우 모델이 성공하려면 현재권력이 희생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필요조건과 미래권력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충분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나를 밟고 가라'고 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임기를 8개월여 앞뒀던 전두환과 달리 윤 대통령은 아직 3년 넘게 남았다. 미래권력에게 칼자루를 넘기고 바지사장으로 남기엔 너무 긴 시간이다. 한 위원장의 리더십도 의문표다. 특히 정치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 '미래비전'에 대해서는 윤 대통령만큼이나 빈칸인 것 같다. 등판 첫무대에서 한 위원장은 과거만 겨냥했을 뿐 어떤 미래도 내보인 게 없다. 게다가 또 다른 정치리더십 항목인 '여론 민감성'에 대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물론 노태우 모델이 완전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전두환도 처음부터 무릎을 꿇을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국 곳곳에서 20일 넘게 항쟁이 이어지고 정권의 지속성이 위협받자 마지못해 후퇴했다고 보는 게 맞다. 마찬가지로 보수의 위기의식이 이번에도 선택압(選擇壓)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D-100일 현재 총선구도는 '정권심판론'

어쨌건 여권이 '기승전 윤석열'인 총선구도를 바꾸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D-100일 현재까지는 '정권심판론'으로 봐야 한다. '검사 대 피의자' 프레임은 그냥 여권이 기대하는 그림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동훈 비대위가 '용산과의 관계 재정립'이라는 고차방정식을 풀지 못하면 윤 대통령도 한 위원장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선택지도 시간도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총선까지 남은 100일, 과연 한 위원장이 선택할 카드는 무엇일까, 그리고 윤 대통령의 카드는 또 무엇일까.

남봉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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