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와 함께하는 과학산책
'영원한 화학물질'과 반도체산업에서의 ESG
유럽연합(EU)은 화학물질로부터 인간과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화학물질규제법인 리치(REACH)를 발효 중이다. REACH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화학물질들은 EU 영내에서 생산과 유통이 제한된다. 올해 초 유럽화학물질청은 REACH에 따라 규제를 준비 중인 수만종의 제한물질 리스트를 발표했다. 이 리스트 중 가장 관심을 받는 물질은 과불화화합물(PFAS)이다. 유럽화학물질청의 검토와 의견수렴을 거쳐 EU 집행위원회에서 규제안이 채택되면 빠르면 2026년부터 PFAS의 사용제한 조치가 적용될 전망이다.
미국에서도 연방 독성물질관리법(TSCA)에 의한 PFAS 규제가 논의되고 있다. 일부 주에서는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2030년 이후 PFAS 사용을 금지한다는 엄격한 법이 이미 제정됐다.
산업적으로 활용되는 PFAS는 4000종이 넘는다. 현재 이중 극히 일부에 대해서만 규제지침과 제한이 적용된다. 나머지 화합물은 식품포장재부터 조리기구 의류 카펫 등 소비자 제품과 배터리 자동차 의료장비 반도체 등 산업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번 PFAS 규제는 산업계 전반에 큰 영향을 줄 전망이다.
대표적인 분야가 반도체산업이다. 강한 내연성과 내식성을 갖는 PFAS는 오랜 시간 동안 반도체 산업에서 필수물질로 사용되었다. PFAS는 반도체 제조의 핵심인 노광(Lithography) 공정의 포토레지스트 및 식각(Etching)에서 냉매로 사용되는 화학물질이다. 현재 대체물질은 전무하다. 따라서 PFAS 규제는 반도체 제조 공정을 완전히 멈추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떤 이유로 이렇게 필수불가결한 화학물질을 대체제도 개발되지 않은 상황에서 규제를 하려는 것일까?
영화 '다크워터스'로 PFAS 유해성 알려져
PFAS는 탄소와 불소 결합으로 이뤄진 화합물이다. 탄소-불소의 강한 결합력으로 인한 화학적 안전성과 소수성, 친수성을 동시에 가져 표면처리를 비롯해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널리 사용됐다. 그러나 환경에 배출되거나, 우리 몸 속에 들어오면 분해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 '영원한 화학물질 (Forever Chemicals)'이라고도 불린다. 이처럼 잔류성이 큰 물질인데도 널리 사용되다 보니, 전세계 인구의 99%가 이미 PFAS에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PFAS는 잔류성 뿐만 아니라 다양한 독성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PFAS의 유해성은 2019년 개봉한 영화 '다크워터스'로 널리 알려졌다. '다크워터스'는 PFAS 배출로 지역 주민들에게 심각한 건강 피해를 야기한 미국의 화학기업 듀폰에 맞서 싸운 한 변호사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음식이 눌어붙지 않는 테플론 코팅 프라이팬의 코팅제가 바로 PFAS이고 이 프라이팬을 만든 화학기업이 듀폰이다.
영화는 1998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의 한 농부가 듀폰의 폐기물 매립지가 마을에 들어선 후 자신의 농장 젖소들이 죽어간다고 변호사를 찾아오며 시작된다. 변호사는 사건을 파헤치다 거대 화학기업 듀폰이 PFAS를 무단으로 엄청난 양을 유통시켰고, 그렇게 PFAS에 노출된 사람들에게서 암 등 다양한 질병이 나타나고 있다는 충격적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는 20년만인 2017년, 3000명 이상의 PFAS 노출 피해자와 듀폰사가 보상금 합의에 이르는 기나긴 과정에서 화학물질로 고통받은 피해자들과 변호사가 얼마나 지쳐가는지를 함께 보여준다. 2000년대 들어 PFAS의 광범위한 노출과 그로 인한 독성에 관한 학술적 연구 결과가 꾸준히 나오고 있었는데, 이 영화를 계기로 PFAS의 유해성은 일반 대중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기술 개발에서도 환경 건강 안전 고려해야
최근 EU의 PFAS규제 움직임에 대한 보도는 규제로 인해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대부분이다. 아쉽게도 이 물질의 규제가 왜 필요한지,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많지 않다. 그동안 기술의 개발은 효용성과 경제성만을 고려했다. 반도체처럼 경쟁이 치열한 첨단기술 분야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개발한 기술들의 이면을 목도하고 있다. 기후위기를 포함한 여러 환경문제가 그것이다.
이제 기술개발에서도 환경 건강 안전(EHS)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ESG 경영의 'E'가 바로 그런 원칙이다. 아마 세계적으로 PFAS 대체제 개발이 가속화될 것이다. 이번엔 물성뿐만 아니라 잔류성과 독성도 고려한 안전한 PFAS 대체제가 개발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