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스타트업 붐, 기업가정신 되살아나
월 평균 기업설립 40만건 넘어, 팬데믹 이전의 2배 … 이코노미스트 “생산성 향상 여부 관심”
미국은 기업가정신에 힘입어 혁신의 최첨단을 달리는 나라로 명성이 높다. 하지만 최근 수년 동안 일부 경제학자들은 그같은 명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우려를 내놓았다. 1982년 미국 기업의 약 38%가 5년 미만 신생기업이었는데, 2018년 29%로 그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미국인 비율도 마찬가지로 감소했다.
실리콘밸리엔 하이테크 마법사들로 넘쳐났지만, 대기업들이 최고의 연구자들을 모아두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는 속도가 느려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이러한 역동성 감소를 생산성 성장률 약화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하지만 갑자기 상황이 바뀐 것처럼 보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지난 13일 “여러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인들이 다시 도전정신을 발휘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스타트업 활동을 보여주는 기업설립 신청서다. 기업설립 신청은 미국이 코로나19 팬데믹 영향권에 있던 2020년 중반 급증했다.
하지만 당시의 급증은 진짜가 아니라는 평가를 종종 받았다. 일부 신생기업은 중소기업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원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설립됐다. 또 다른 기업들은 안면 마스크를 수입하거나 손 소독제를 판매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는 팬데믹이라는 이례적인 상황이 반영된 것이었다.
팬데믹 끝나도 지속되는 창업 증가세
하지만 팬데믹이 사라진 지 한참 지난 현재도 기업설립 신청 급증세는 지속되고 있다. 지난해 기업설립 신청 건수는 550만건으로 사상최고치를 기록했다. 올해 다소 둔화되기는 했지만 코로나 이전 10년 동안의 월평균보다 여전히 약 80% 높은 수치다. 반면 유럽의 경우 20% 증가에 그쳤다.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스타트업은 일반적으로 고용창출에 큰 역할을 한다. 팬데믹 이전 4년 동안 기존 기업들이 1개의 일자리를 순증가시켰을 때 스타트업은 4개의 일자리를 늘렸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4년 동안 스타트업이 일자리 4개를 순추가할 때 기존 기업들은 1개의 일자리를 실제로 잃었다.
숫자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떤 종류의 벤처기업들이 만들어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2020~2021년 많은 스타트업들이 재택근무 혁명에 부응했다. 여기에는 온라인소매업체, 소규모 트럭운송회사, 조경업체 등이 포함됐다. 하지만 연준 경제학자 라이언 데커와 메릴랜드대 존 홀티웨인저 교수에 따르면 2022년 중반부터 그 주도권이 기술기업들에게 넘어갔다.
미국 인구조사국이 올해 3월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지난해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한 기업설립 신청이 특히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컴퓨터와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했던 1990년대를 떠올린다. 싱크탱크 ‘이코노믹 이노베이션 그룹’의 케난 피크리는 “경제 전반에 걸쳐 기업가적 잠재력이 한단계 증가한 것처럼 느껴진다”며 “어떤 기업이 차세대 성장기업이 될지 알 수 없다. 따라서 더 많은 기업들을 주시할수록 좋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창업 붐을 일으켰을까. 우선 팬데믹으로 수백만명이 일자리를 잃고 더 많은 사람들이 원격근무로 전환해야 했던 상황이다. 그린빌의 흑인기업가를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빌리지 론치(Village Launch)’의 자넷 브루스터는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로움을 선사했다”고 말했다.
빌리지 론치의 네트워크에 속한 스타트업에는 푸드트럭과 수공예품 제작사, 법률사무소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창업은 더 큰 부를 향한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 브루킹스연구소에 따르면 2019년 사업체를 소유한 가족 중 흑인은 5%, 히스패닉은 4%에 불과했다. 2022년 그 비율은 각각 8%와 7%로 증가했다.
강한 경제도 도움이 됐다는 분석이다. 고용시장이 타이트할 때 잠재적인 스타트업 창업자는 여차하면 유급 일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기가 더 쉽다. 새로운 기술, 특히 AI의 출현도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 기업가들은 고객과 소통하고, 세금을 준비하고, 법원기록을 검색하는 등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AI기반 도구를 속속 개발하고 있다.
메릴랜드대 홀티웨인저 교수는 “반드시 스타트업에서 혁신으로 이어지는 일방향의 인과관계만은 아니다. 인과관계는 양방향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며 “특히 잠재적으로 큰 시장기회를 낳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에 혁신은 스타트업들을 끌어들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소수 지역에서 미국 전역으로 확산
미국 스타트업 호황의 두드러진 특징은 지리적 확산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혁신은 캘리포니아 베이 지역과 오스틴, 뉴욕 등 역동적인 지역에 집중됐다. 하지만 현재진행중인 새로운 물결은 아이다호주에서 노스캐롤라이나주까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 미국진보센터(CAP)에 따르면 2021~2023년 미국 50개주의 기업설립 신청건수가 팬데믹 이전 3년(2017~2019년)보다 모두 높아졌다. 와이오밍주는 93%(1만4000여건 증가), 델러웨어주는 92%(2만1900여건 증가), 미시시피주는 78%(2만2600여건 증가) 늘었다.
44%(4만6900여건 증가) 늘어난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경우, 휴양도시인 그린빌이 대표적 사례다. 경쟁적인 사업문화보다는 온화한 분위기와 걷기 좋은 시내로 더 잘 알려진 이 도시는 기업가정신의 요람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하지만 지난 수년 동안 원격근무가 활성화되면서 주거 쾌적성이 장점으로 부각됐다.
원격근무의 확산으로 인해 신생 스타트업도 대규모 인재풀을 활용할 수 있게 됐다. 2022년 과밀화된 받은편지함을 관리하고 고객에게 답장할 수 있도록 AI로 도와주는 앱 ‘슈퍼문’을 만든 존 바넷의 팀에는 캘리포니아 베이 지역과 런던의 엔지니어들이 포함돼 있다.
2022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서 창업해 착용자의 체온과 심박수, 생리주기까지 추적하는 마이크로 전자장치가 내장된 귀걸이를 개발한 ‘인코라 헬스’는 실리콘밸리의 제품디자이너와 뉴욕의 전략컨설턴트로부터 두뇌를 빌렸다.
물론 벤처투자 전통이 깊지 않은 미국 남동부 주에서는 자금조달이 여전히 어려운 과제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소재 벤처캐피털 회사 ‘굿그로스캐피털’의 존 오스본은 “우리는 활기찬 스타트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초기단계에 있다. 아직은 성숙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금리상승으로 미국 벤처캐피털 자금조달은 지난해 60% 급감했다. 6년 만의 최저치였다. 하지만 많은 기업들이 초기에 모금한 자본을 아직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는 아닌 상황이다.
결국 스타트업 붐이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질지 여부가 가장 큰 관심사다. 이론적으로 새로운 기업의 등장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창업기업들이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고 새로운 사업모델을 창출하면서 기존 기업들과 경쟁하고, 그 과정에서 성장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수치로 잡히는 건 없다. 지난해 미국 노동생산성이 증가했지만 2022년 감소한 것을 만회한 수준에 그쳤다.
한가지 가능성은 새로운 세대의 스타트업이 이전 세대의 신생기업에 비해 성장에 덜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효율성 향상보다는 사람들이 일하는 장소와 방식의 변화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미국이 ‘솔로우 역설’을 또 다시 겪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1987년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로버트 솔로우는 PC가 보급됐지만 생산성은 높아지지 않았던 1980년대 경험을 근거로 “어디에서나 컴퓨터 시대를 실감할 수 있지만 생산성 통계에서만은 예외”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결국 솔로우 역설은 해결됐다. 1990년대 중반이 되자 생산성 향상은 뚜렷해졌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현재 미국 전역에서 창업붐이 불고 있지만 생산성 데이터에서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1990년대와 마찬가지로 최신 스타트업들이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려면 수년이 걸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