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자본시장통합 이번에도 무산되나

2024-04-24 13:00:02 게재

미중에 치인 유럽, 경쟁력 강화 차원서 추진 … 프랑스 등 대국은 찬성, 벨기에 등 소국은 반대

미국에 뒤처지고 중국에 치인다는 유럽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경제와의 격차는 점차 벌어졌다. 유럽대륙에서 거대 기술기업이 탄생하지 않고 있다. 중국은 막대한 공공보조금으로 유럽의 친환경 전환 시장을 압도할 기세다.

유럽의 경쟁력이 위태로운 가운데 자본시장을 통합하자는 아이디어가 다시 주목 받았다. 광범위하고 풍부하며 탄력적인 자금공급원이 확보되면 유럽기업들도 중국·미국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부채수준이 높은 유럽 각국으로선 공공보조금 정책만으로 기업경쟁력을 늘리기 어려운 만큼 통합된 자본시장에서 활로를 모색하자는 아이디어다.

23일 프랑스 일간 르몽드에 따르면 이달 17일(현지시각)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은 자본시장 통합을 비롯한 개혁안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경제규모가 큰 국가들은 찬성을, 벨기에와 아일랜드 등 규모가 작은 국가는 반대 의사를 내비쳤다.

정상회의에 유럽경쟁력 강화방안 발표자로 참석한 이탈리아 전 총리 엔리코 레타는 “금융부문에서 유럽통합을 완성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오는 6월 유럽 경쟁력 제고와 관련한 또 다른 보고서를 제출할 예정인 유럽중앙은행(ECB) 전 총재 마리오 드라기도 “현재의 유럽연합은 미국과 중국과 같은 강대국에 맞설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며 “우리의 조직, 의사결정 및 자금조달은 ‘코로나 이전, 우크라이나 이전, 중동분쟁 이전, 강대국 경쟁의 귀환 이전’의 세계에서 설계됐다. 미국과 중국에 흡수되지 않으려면 EU는 현재와 미래 세계에 적합한 수단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르몽드는 사설에서 “유럽연합이 기존의 구조에 머물러 있다면 중국과 미국에 계속 뒤처질 것이다. 미국처럼 통합된 자본시장이 있다면 유럽의 잉여 민간저축을 동원해 친환경 및 디지털 전환을 위한 장기투자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잉여저축, 장기투자로 전환 시급

유럽 자본시장통합 아이디어는 10년 전으로 거슬러오른다. 2014년 7월 15일 당시 EU 집행위원장인 장 클로드 융커가 유럽의회 연설에서 처음 제안했다. 당시 유럽은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국가부채 위기에서 막 벗어나고 있던 때였다. 투자 활성화보다는 금융시장 안정화에 더 중점을 둔 개념이었다.

그동안 유럽의 자본시장 통합은 끊임없이 논의되는 이슈였다. EU는 지난 10년 동안 기업공시를 위한 유럽 단일 공시플랫폼, 거래데이터 통합, 성공적인 투자상품이 될 수 있는 유럽장기투자펀드 출시 등 유용한 자본시장 개혁 관련제안을 내놨다. 하지만 실행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동시에 금융시장의 자금으로 전환되는 저축의 비율은 정체되고 있다.

유럽증권시장감독청(ESMA)의 전 청장 파브리스 드마리니는 “10여년 만에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EU의 상대적 규모는 18%에서 10%로, 세계 100대 기업 시가총액에서 유럽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1%에서 5%로 감소했다”고 지적했다.

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2030년까지 유럽의 친환경 전환에 연간 6200억유로(약 920조원), 디지털 전환에 1250억유로(약 190조원)의 투자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투자는 공공자금만으로는 충당할 수 없다. 자본시장 통합을 통해 유럽의 잉여저축을 장기투자에 활용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는 이유다. 유럽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 샤를 미셸은 “친환경 전환을 위한 미국의 투자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라면 유럽의 그같은 투자는 자본시장 통합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유럽 자본시장은 각국 내로 한정돼 있기에 대규모 자본동원과 투자가 어렵다. 때문에 많은 유럽기업들은 미국으로 떠나고, 많은 유럽자본은 미국 자본시장을 투자처로 삼고 있다. 예를 들어 유럽의 기술스타트업은 미국기업에 인수되는 경우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다. 이는 미국에 비해 벤처투자(VC)에 대한 접근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2022년 기준 미국의 VC 투자는 GDP의 1%로, 0.10%에 불과한 EU보다 10배 높았다.

국제통화기금(IMF) 연구에 따르면 유럽 자본시장의 국가별 분열은 기업의 자금조달 비용 차이로 이어진다. 현재 유럽 자본시장의 발전이 더디다는 것은 기업들이 유럽 자본시장이 제공할 수 있는 자금과 투자의 혜택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투자처로서의 EU의 매력과 기업의 규모 확대 및 EU 상장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저축자와 투자자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도 제한된다.

결국 소규모 자본풀, 파편화된 시장, 은행에 대한 과한 의존도는 스타트업과 혁신기업의 전망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더 크고 유동적인 자본시장과 금융시장을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위험회피 성향 큰 유럽

유럽중앙은행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지난해 11월 19세기 미국의 철도사업 호황을 예로 들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촉구했다. 당시 미국 자본시장은 주별로 분열돼 현지 투자자들은 철도 부설과 같은 장기프로젝트의 위험을 감당할 능력이나 자본이 없었다. 라가르드 총재는 “철도를 국가의 미래에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미국은 더 많은 국내외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해 통합된 자본시장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유럽도 비슷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유럽인의 저축액은 9조유로(약 1경3200조원)로 전세계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유동성투자(당좌예금 및 저축예금)나 저위험투자(생명보험을 통한 국채)에 집중돼 있다. 때문에 유럽기업들이 필요한 자금은 대부분 은행에서 조달한다. 또 시민들에게 저축과 투자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주로 은행과 보험회사다.

EU에 따르면 유럽 자본시장 인프라는 주선자 겸 투자자인 △은행 37조유로 △투자회사 0.5조유로, 투자자인 △투자펀드 16조유로 △생명보험사 3조유로 △민간연기금 3조유로 등으로 구성돼 있다.

또 EU가 27개 회원국 시민들을 대상으로 ‘현재 보유하고 있거나 지난 2년 동안 가입한 금융상품’을 물어본 결과(복수응답 허용), △개인연금·퇴직상품 22% △생명보험 31% △손해보험(주택보험·자동차보험) 46% △모기지·주택대출 20% △기타 소비자대출 14% △투자상품(펀드·주식·채권) 24% △암호화증권(암호화폐 포함) 6% △하나도 없음 21% △모름/무응답 3%였다. 투자상품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극히 낮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거의 모든 경제주체가 만족한다는 점이다. 정부는 재정적자를 충당하기 위해 국내저축이 필요한 상황이다. 은행과 보험사는 규제에 따른 건전성 제약을 준수해야 한다. 저축자의 경우 저금리저축의 안전성에 덧붙여 세제혜택을 받는다. 한마디로 유럽인들은 리스크를 혐오하고 있다. 이는 미래를 위한 자금조달능력을 저해한다.

따라서 관건은 저축을 장기투자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래야 기업의 자기자본을 강화하고 스타트업 육성, 거대 기술기업 출현 및 친환경 전환에 필수적인 인프라 구축이 가능하다. 이같은 점에서 통합된 미국 자본시장 생태계는 EU보다 두드러진다. 유럽의 GDP 대비 주식금융 비율은 미국의 절반 수준이다.

EU 회원국 절반, 자본시장통합에 난색

자본시장 통합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프랑스다. 프랑스는 최근 이탈리아와 스페인 네덜란드 폴란드의 지원을 받아 유럽 자본시장 통합을 강화하고 시장감독을 중앙집중화하기 위한 개혁을 주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 프랑스는 EU 금융규제기관인 유럽증권시장감독청(ESMA)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방안을 선호한다.

프랑스는 자본시장을 통합하면 연간 수천억유로에 달하는 친환경·디지털 전환을 위해 민간자본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유럽의 분열된 자본시장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EU 27국 중 절반에 가까운 12개국이 반발하고 있다. 많은 나라들이 국가통제권을 포기하고 EU에 더 많은 감독·규제 권한을 넘기는 것을 꺼린다.

17일 정상회의에서 에스토니아 총리 카자 칼라스는 “작은 나라인 우리는 경쟁우위가 많지 않다. 하지만 매우 경쟁력 있는 세금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를 빼앗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아일랜드 총리 사이먼 해리스도 시장감독의 중앙집중화에 대해 “모든 회원국에게 최선의 이익이 아니다. 확실한 건 소규모 회원국에게 최선의 이익이 아니라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에스토니아와 아일랜드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불가리아 키프로스 체코 크로아티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몰타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등 12개국이 반대의사를 명확히 했다. 이들 국가는 “EU 기관이 시장감독권을 갖게 되면 각국의 금융산업에 추가비용을 발생시키고, 규모가 더 큰 국가의 자본시장이 경쟁우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수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EU 정상들은 자본시장 통합과 관련한 결정을 연기하기로 했다. 파리1대학 명예교수인 크리스티앙 드 보이시유는 “아직 통합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며 “유럽 각국간 법률 시스템 차이도 여전히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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