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5
2026
영국 시인 엘리엇은 ‘황무지’의 첫 구절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선언한다. 4월을 봄이 시작되는 달로 이해한 그는 봄을 희망과 생명의 계절로 여기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죽어 있던 것들을 다시 깨우고 과거의 기억과 욕망을 되살리는 시기로 여겼기 때문이다. 즉, 엘리엇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히려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기억과 공허함을 환기시키는 역설적인 계절이라고 표현했다. 학창 시절의 필자는 엉뚱한 이유로 4월이 잔인한 달이라는 점에 공감했다. 4.19 학생혁명 기념일에 즈음한 4월 중하순은 벚꽃이 만개한 시기였다. 그런데 중간고사로 인해 꽃구경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었고, 시험이 끝난 후 돌아보면 꽃이 모두 져 버린 상황이었다. 청춘의 계절을 공부하느라 챙기지 못하고 시험이 끝난 후 비에 젖어 땅에 떨어진 꽃잎을 확인하는 4월이 잔인하다며 엘리엇의 표현에 동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엘리엇이 현대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면 4월이 아니라 3월을 잔인한 달이라 표현해야 할 듯하다
04.08
‘미스트롯’과 같은 TV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드러난다. 경쟁의 수준은 참가자의 의지보다 보상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참가자들의 실력 차이는 크지 않지만 결과에 따라 보상은 극단적으로 갈린다. 우승자는 상금뿐 아니라 방송 광고 공연기회를 사실상 독점한다. 반면 결승 진출자와의 차이는 단순한 금액을 넘어 ‘기회의 격차’로 확대된다. 그럼에도 참가자들은 모든 것을 걸고 경쟁한다. 보상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집중하는 구조가 경연의 수준을 끌어올린다. 이 원리는 에너지 소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난 3월 26일 제2차 비상경제점검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전기요금은 동결하되, 국민들께서는 에너지 절약에 적극 동참해 달라”고 밝혔다. 물가와 민생을 고려한 현실적 선택이다. 그러나 요청만으로 행동이 바뀔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하는 이유는 단기적 수급불안에만 있지 않다. 탄소중립을 위해서도 시민들의 소비패턴 변화는 필수적이다.
04.01
혁신정책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프라운호퍼 연구소의 야콥 에들러는 “혁신의 확산은 공급만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특정 산업 이야기가 아니다. 혁신 일반론이다. 그런데 이 한 문장은 한국 농업 연구개발(R&D)의 현실을 정확히 설명한다. 한국은 농업 R&D에 연간 1조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한다. 농촌진흥청만 해도 2026년 기준 6238억원을 R&D에 쓴다. 산림청과 농식품부 사업까지 합치면 규모는 훨씬 커진다. 숫자만 보면 충분해 보인다. 그런데 성과를 묻는 순간 답은 흐려진다. 논문과 특허는 쌓이고 기술시연회도 매년 열린다. 하지만 그 기술로 시장에서 매출을 올리며 자생하는 민간기업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이는 연구 성과가 산업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종자산업이 이를 잘 보여준다. 국내 민간 종자시장 규모는 6757억원으로 세계 시장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종자업체 2143개 중 91.6%가 연 매출 5억원 미만이며, 실제 육종 실적이 있는 기업
03.25
이제 세계 시장은 더 이상 '평평한 공간'이 아니다. ‘평화 배당금’을 즐겼던 지난 30년간의 세계 경제에서 공간은 그저 운송비용과 관리비용의 문제일 뿐, 대개 균질적인 추상적 공간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몇년 간 계속되는 우크라이나전쟁과 이번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계기로 지리학 혹은 지정학의 논리가 세계 경제에 전면적으로 등장했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힌 지 한달이 다 되어가지만 뉴스의 초점은 여전히 석유 및 LNG와 같은 에너지 가격에만 쏠려 있다. 하지만 지구적 산업 문명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비료 또한 이번 봉쇄로 물류가 막혀 버렸다는 사실은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에너지 넘어 비상 걸린 비료시장 호르무즈 봉쇄로 연간 약 1600만 톤의 비료 생산 능력이 걸프만 안에 갇혔다. 이는 세계 해상 요소 인산염 거래량의 약 35%가 하룻밤 사이에 시장에서 사라진 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비료시장의 불안은 이듬해 수확을 막아버란더. 전세계 곡물 시장은 일찍
에너지전환은 단지 발전원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에너지시스템 전체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재생에너지와 원전 등 저탄소 전원을 확대하고, 전기차와 히트펌프 보급을 늘리며, 산업의 전기화와 수소 기반 전환을 추진하는 방향 자체는 분명하다. 그러나 전환이 진전될수록 전력 문제는 더 이상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제는 전기를 언제 얼마나 어디서 쓰도록 유도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은 자연조건에 따라 출력이 달라지고, 전기차 충전과 히트펌프 난방 수요는 특정 시간대에 집중된다. 결국 전력시스템의 부담은 총수요의 크기 자체보다 시간과 지역에 따라 수요와 공급이 엇갈리는 데서 더 크게 발생한다. 그동안 우리 에너지정책은 주로 인프라 확충에 초점을 맞춰 왔다. 발전설비를 더 짓고, 송전망과 에너지저장장치를 확충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런 노력도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에너지 자원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전력망 역시 사실상 외부와 연결되지
03.18
전쟁은 생명을 파괴하는 가장 참혹한 행위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전쟁의 또 다른 얼굴을 점점 더 분명히 목도하고 있다. 그것은 지구환경과 기후에 남기는 전쟁의 파괴적인 흔적이다. 전쟁의 상처는 사람을 죽이고 도시를 무너뜨리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군사작전에 사용되는 무기와 연료는 대기와 물, 숲과 토양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파괴한다. 지금 중동과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개의 전쟁은 지구에 가해지는 가장 야만적인 파괴 행위가 바로 전쟁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전쟁은 ‘군사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대기 중 탄소농도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는 ‘기후사건’이기도 하다. 화석연료 시대의 무력충돌은 필연적으로 대규모 탄소배출로 이어진다. 전투기와 군함, 탱크 등 무기체계 운용과 군수물자 수송은 세계에서 가장 에너지 집약적인 활동 가운데 하나다. 전투기 1대가 단 1시간 비행으로 배출하는 탄소는 일반 승용차가 700시간 넘게 운행하면서 내뿜는 양과 맞먹는다. 군대와 방위산업
03.11
미국의 대이란 전쟁으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모처럼 활기를 맞았던 국내 주식 장이 극심한 변동성에 휩싸이며 경제적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우리 경제에 드리운 이러한 위기감은 세계 경제의 불안정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지목되어온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에도 그 원인이 있다. 한국은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도, 에너지 집약산업의 비중,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로 에너지의 약 94%를 수입에 의존한다. 게다가 1차 에너지 소비량의 40%에 달하는 석유는 70% 정도를 중동에서 수입할 만큼 공급선이 편중된 구시대적 에너지 체제를 갖고 있다. 이번 중동 전쟁은 우리에게 화석에너지로부터의 탈피가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얼마나 시급한 과제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은 이미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확인된 바 있는 뼈저린 교훈이기도 하다. 2021년 초 약 18유로였던 유럽의 가스가격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03.04
올해부터 유럽연합(EU)은 그동안 시범사업 차원에서 시행해 온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본격 시행한다. 탄소국경세는 탄소배출규제가 느슨한 국가에서 생산된 제품을 유럽연합(EU)으로 수출할 때 제품 생산과정에서 배출된 탄소량에 따라 비용을 부과하는 제도다. CBAM이 수입품에 대해 탄소비용을 징수하는 방법은 EU내 기업들을 대상으로 실행 중인 배출권거래제의 배출권을 구매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들어 EU 배출권 가격은 예상과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1월 15일 기준으로 이산화탄소 톤당 배출권 가격은 92유로였는데(2023년 8월 이후 최고치), 그로부터 한 달 후인 2월 25일 기준으로 72유로를 기록해 약 20% 하락했다. 현재 EU 집행위원회가 논의중인 EU 배출권거래제 완화 관련 불확실성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완화에는 배출권거래제 주요 대상이 전력에서 산업까지로 본격 확대됨에 따라 무상할당 기한 연장, 배출권 가격 인하,
02.25
인류 역사에서 2022년 11월은 단순한 기술 진보를 넘어 시대의 질서를 바꾼 상징적 순간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오픈AI의 ‘챗GPT’가 공개되면서 우리는 정보화 시대를 넘어 ‘AI 전력 시대’로 진입했다. 이제 전력은 공장과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연산을 통해 가치를 만드는 ‘디지털 산업’이 전력을 가장 빠르게 빨아들이는 새로운 수요 중심으로 떠올랐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2년 약 460TWh로 추정한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가 2026년에는 1000TWh를 넘어설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이는 일본의 연간 전력 소비 규모에 맞먹는다. 불과 몇 년 사이 전세계 전력 지형을 흔드는 ‘새로운 산업’이 등장한 것이다. 데이터센터의 비중은 아직 세계 전력 소비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증가 속도는 무섭다. IEA는 데이터센터가 2024년 기준으로 세계 전력 소비의 약 1.5% 수준에 이르렀다고 추정한다. 문제는 이 수요가 특정 지역에 집중되며 전력망의 여유를 급격히 소진시킨다는
02.11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또 하나의 공론화가 국회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국회 기후위기 특별위원회에서 진행하는 탄소중립기본법 개정을 위한 공론화가 그것이다. 2년 전, 헌법재판소가 현행 탄소중립기본법이 미래세대의 환경권을 침해하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판단했고, 올해 2월까지 국회가 관련 법률을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번 공론화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우리가 어떻게 충실하게 이행할 것인지 논의하는 숙의민주주의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기대만큼 우려가 크다. 국회가 제시하는 일정이 턱없이 짧기 때문이다. 국회 기후특위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이번 공론화는 2월 초부터 3월 말까지 약 두 달 동안 진행될 예정이다. 이 기간 동안 헌법재판소 결정의 의미는 무엇인지 설명하고 핵심 질문을 설정하는 동시에, 300명의 시민대표단도 선발해서 학습과 토론을 진행해야 한다. 작년에 진행되었던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의 경우, 정부안 준비부터 최종 결정까지 약 2년의 기간이 소요되었
02.04
연탄의 기원은 19세기 말 일본 규슈 지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장작과 목탄의 대용품으로 석탄에 구멍을 뚫어 사용한 것이 시초였으며, 20세기 초 수동식 제조기가 발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양산되었다. 우리나라에는 1920년대 일제 강점기 시절 도입되었으나, 주로 산업용이나 일본인 거주지 위주로 사용되었다. 연탄이 서민의 삶으로 들어와 난방과 취사를 책임지는 국민 연료가 된 것은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극심한 연료 부족을 겪으면서부터였다. 연탄은 우리나라에 풍부했던 무연탄을 가루로 만들어 점토와 섞어 원통형으로 가공된 고형 연료이다. 연소 효율을 높이기 위해 뚫은 구멍의 개수에 따라 9공탄, 16공탄, 22공탄, 25공탄으로 나뉘었는데, 초기 대중화된 모델이 구멍이 9개짜리였기에 ‘구공탄’이 대명사처럼 굳어졌다. 1961년 정부가 규격을 19공탄으로 표준화하며 연탄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정착되었다. 1970년대 이후 화력을 높이기 위해 22공탄이 등장했음에도 대중은 여전히
01.28
절기는 단순한 날짜의 흐름이 아니라, 농경 사회에서 축적된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빅데이터였다. 대한(大寒)은 ‘큰 추위’, 소한(小寒)은 ‘작은 추위’를 의미했다. 실제로 기상청 자료를 보면, 20세기 초반(1912~1940년)까지 대한은 이름값을 톡톡히 하며 연중 가장 낮은 기온을 기록하곤 했다. 그러나 기후 시스템이 변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공식이 깨졌다. 소한이 대한보다 더 매서운 추위를 기록하는 빈도가 늘어났고, “소한 추위에 대한이 울고 간다”라는 속담이 과학적 사실로 굳어지는 듯했다. 동지를 지나 새해 벽두에 찾아오는 소한의 위세가 1월 하순의 대한을 압도하는, 즉 겨울의 정점이 앞당겨지는 추세가 나타났다. 그런데 올해, 우리는 기후변화가 단순히 더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해지는 것임을 깨닫고 있다. 1월 초,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 속에 반소매를 입으며 실종된 겨울을 운운했는데, 대한을 기점으로 시작된 기록적인 한파는 한반도를 냉동고처럼
01.21
토미 로빈슨은 잉글랜드 루턴시에서 루턴FC의 훌리건들과 함께 ‘잉글리시 디펜스 리그(English Defence League, EDL)’를 창설하고 반이슬람 활동을 하는 보수성향의 사회운동가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반이슬람 활동 때문이라기보다는 영국 주류언론과의 싸움의 덕이 더 컸다. 영국 주류언론은 그에게 극우 정치선동가라는 딱지를 붙여서 그의 주장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가 제기한 영국 내 이슬람 범죄 행위에 대한 경고를 다민족국가로서 영국의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본 것이다. 반면 토미 로빈슨은 영국의 주류언론이 사실을 왜곡하면서 모든 인종이 함께 잘사는 나라를 강요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주도하는 시위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가 ‘가짜뉴스(Fake News)’다. 주류언론은 토미 로빈슨이 고등학교 졸업도 못한 기술견습생 출신으로 폭력과 사기 전과가 있는 사람이라며 대중으로부터 그를 분리 해체시키고 싶어 했다. 토미 로빈슨은 스마트폰과 유튜브를 활용해 집요하게 자신의
01.14
“2026년 한국의 첫 농업위성이 발사된다.” 이 짧은 문장 속에는 향후 10년 한국 농업의 성패가 담겨 있다. 기후위기로 농업생산은 요동치고 식탁물가의 진폭도 커졌다. ‘기후플레이션’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대다. 그러나 농산물 수급 판단은 여전히 지난해의 경험과 현장의 감각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번 위성발사가 단순한 우주 이벤트로 끝나지 않으려면 농업 인공지능 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농업 인공지능(AI) 정책을 냉정히 진단하자면 나무는 무성하되 숲은 보이지 않는 격이었다. 센서, 드론, 로봇, 온실 제어 알고리즘 등 이른바 기술자들의 인공지능은 넘쳐난다. 그러나 농업구조의 근본적인 개선, 기후 리스크 분산, 농가소득 안정, 그리고 직불제와 재해보험의 정밀화까지 꿰뚫어 보는 정책가의 인공지능은 보이지 않는다. 과거 스마트팜 보급 사업이 남긴 교훈은 분명하다. 현장에 고가의 장비는 깔렸지만 정작 그 데이터를 엮어 농정과 경영을
01.07
말의 기질은 예민하면서도 관대하다. 초원에서 진화한 말은 포식자에 민감한 신경계를 지녔고, 작은 소리와 움직임에도 즉각 반응한다. 동시에 신뢰가 형성되면 상대의 감정과 몸짓에 깊이 공명한다. 생태적으로 말은 땅과 바람의 동물이다. 발굽은 땅을 박차며 에너지를 만들고, 긴 다리와 폐는 바람과 속도를 자신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말은 자연 속에서 언제나 ‘흐름’을 상징해 왔다. 정지보다 이동, 고정보다 변화하는 생명을 상징한다. 올해는 기후, 에너지, 환경 분야에서 흥미로운 대비가 선명해지는 해가 될 것이다. 우선 미국 등의 정책후퇴 기조가 지속될지가 관심사다. 일부 국가에서는 유권자들이 탄소 규제비용 부담을 무겁게 체감하면서 기후정책 추진 정당에 대한 지지가 감소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 분야에서 나타나는 ‘기후 피로감’은 실제 전환의 중단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작 경제와 기술 시스템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의 시계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시대
12.31
2025
교수신문이 선정한 2025년의 사자성어는 변동불거(變動不居)였다. 세상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변한다는 뜻이다. 올 한해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대격변의 시기를 보냈다. 연 초 폭설과 맹추위에도 수많은 국민이 거리에 나와 민주주의 회복을 외쳤고, 6월엔 드디어 국민주권정부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부푼 기대에도 불구하고 다사다난했던 한해가 저무는 지금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변화가 녹록치 않음을 느끼고 있다. 정책적 측면에서 되짚어 볼 때 올 한해 가장 큰 변화와 과제를 동시에 남긴 부문 중 하나가 바로 기후⋅에너지 문제일 것이다. 이재명정부는 재생에너지에 기반한 성장을 핵심기조로 삼고 기후와 에너지를 하나의 행정체제로 통합하는 등 적극적인 에너지전환 정책을 내세우며 대한민국 최초의 기후정부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지난 11월에는 2035년 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53~61%로 설정하고,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도 2030년까지 100GW 수준으로 늘리겠다는 목
12.24
올해도 겨울 영화에 푹 빠져 있다. 캐롤과 하얀 눈으로 가득한 화면만으로도 관객에게 힐링이 되는 계절은 오직 겨울뿐이라서 마치 계절의 선물과도 같다. 그런데 지난 22일 기상청의 발표는 충격적이다. 만약 우리가 탄소 배출을 줄이지 못한다면 21세기 후반에는 서울의 겨울이 현재 102일에서 12일로 줄어 드는 등 사계절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 때문이다. 지난달 정부는 우리나라의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NDC) 2018년 순배출량 대비 53~61% 감축하는 것으로 확정했다. 강화된 NDC 달성을 위해 정부는 다양한 정책 수단을 사용하는데, 특히 주요 배출 부문인 전력부문과 산업부문의 감축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배출권거래제가 운영되고 있다. NDC강화는 곧 배출권거래제의 강화로 이어지는데, 지난달 확정된 제4차 계획기간(2026~2030년)의 배출권거래제 할당계획에서 기업들이 무료로 배출할 수 있는 탄소의 총량을 줄여 탄소규제 강화를 공식적으로 구체화
12.17
기후에너지환경부 김성환 장관이 내년 5월까지 마련될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의 밑그림을 제시했다. 전력 수급의 안정성 확보와 더불어, 인공지능(AI)과 첨단산업에 대한 전력 공급, 그리고 재생에너지 중심 전환을 위한 설계도를 마련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수립 과정에서 ‘국민과 소통하며 함께 만드는 개방형 전기본’을 만들겠다고 방향을 밝혔다. 탄소중립 이행에서 ‘전기화’가 핵심 수단인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전기본의 어깨가 무겁다. 본연의 목적인 안정적인 전력 공급뿐만 아니라 경제성 확보와 재생에너지 중심 전력 시스템 구축이라는 과제도 동시에 실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전력 설비 확대에 따른 주민 수용성 확보라는 네 번째 토끼도 잡아야 한다. 제12차 전기본은 지난 11월 이재명정부가 수립한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2035 NDC)를 뒷받침하는 첫 번째 법정 계획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2035 NDC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35년까지 온실가스를 2
12.10
“태양광은 그저 비싼 장난감일 뿐이다.” 1954년 미국 벨 연구소(Bell Labs)가 실리콘 태양전지를 세상에 처음 공개하며 작은 장난감 관람차를 돌려 보였을 때 쏟아진 반응은 경탄보다는 냉소에 가까웠다. 당시 1와트(W)의 전기를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은 현재 가치로 수천달러에 달했기에 석탄과 석유가 헐값에 에너지를 공급하던 그 시절 햇빛 발전은 ‘신기하지만 비싼 과학 실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지금 판도는 완전히 뒤집혔다.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전세계 신규 발전 설비의 약 86%가 재생에너지로 채워졌으며, 태양광과 풍력은 명실상부한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주류로 등극했다. 이러한 재생에너지의 역사는 ‘학습곡선(Learning Curve)’을 뚜렷하게 증명한다. 초창기 6% 효율에 불과했던 태양전지는 누적 생산량이 두배가 될 때마다 가격이 약 20%씩 하락한다는 ‘스완슨의 법칙(Swanson’s Law)
12.03
열역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기술의 시대적 역할을 고민하는 필자에게 수소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물질이다. 수소는 어떤 물질보다 단위 질량당 에너지 밀도가 가장 높고, 무엇보다도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다. 태초부터 태양의 핵융합 반응을 통해 지구 생명체에 에너지를 공급해 오고 있는 수소를 화석연료 대안으로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20세기 초, 수소는 식량문제 해결 수단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하버-보슈 공정으로 수소를 질소와 결합해 만들어진 암모니아를 원료로 하는 합성비료는 인류의 농업 대전환을 이끌었다. 그후 수소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자동차 매연 문제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가 도심 공해문제 해결을 위해 무공해 차량 의무판매 정책을 도입했고 2010년대 초반에 수소차가 이 정책의 핵심수단으로 떠오르자 도요타와 현대자동차는 투자를 본격화했다. 그러나 그후 시장의 판도는 급변했다. 테슬라가 주도하는 전기차 시장의 폭발적 성장으로 수소차는 설 자리를 잃었다. 때마침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