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볼, 보이지 않는 가치의 경제

2024-03-15 13:00:01 게재

30초짜리 광고 한편에 700만달러 … 1984년 애플 광고 계기로 대전환

적응이 필요한 것은 시차만이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적기를 타고 13시간을 날아 도착한 인천의 새벽 공기는 매우 차가웠다. 체감온도 영하 20℃까지 떨어졌던 겨울 추위가 한풀 꺾였다고 들었지만 공항 밖은 여전히 매서웠다. 이민가방 8개를 옮겨 실으면서 정신이 버쩍 들었다. 시간의 차이, 공간의 변화, 급격한 공기의 전환을 능숙하게 다루기에 필자는 미숙했다. 어느새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실리콘밸리 생활에서 3년간 온실 속의 잡초처럼 살았기 때문이리라.

실리콘밸리의 시공간에서 하루빨리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라도 의식(ritual)이 필요했다. 처음 기울인 노력은 ‘제58회 슈퍼볼 시청’이다. 한국 시각으로 설 연휴 마지막날인 지난달 11일 아침 8시 40분, 미국 미식축구리그(NFL) 결승전이 시작됐다. 미식축구 규칙도 모르는 필자가 졸린 눈을 비비며 컴퓨터 앞에 앉은 까닭은 단 하나다. 실리콘밸리에서 거주하던 집 바로 옆에 있던 리바이스(Levi’s)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49ers)가 결승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산책을 나섰던 2시간짜리 코스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샌프란시스코만(灣)으로 가서 바다를 보고 리바이스 스타디움을 거쳐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경로였다. 아쉽게도 경기를 관람하러 리바이스 스타디움을 방문한 적은 없다. 입장료가 수백 달러에 달한 만큼 비싸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경기방식을 몰라서 내키지 않았다. 2021년 미국에 도착한 첫해, 코로나19 백신을 맞으러 리바이스 스타디움 안을 들어갈 수 있던 게 그나마 커다란 위안이 됐다.

‘1849년 개척자들’ 이름 딴 미식축구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의 49는 1849년을 의미한다. 1848년 1월 24일, 목수 제임스 마셜(James Marshall)이 캘리포니아 주도 새크라멘토에서 80㎞ 떨어진 콜로마강에서 처음으로 사금을 채취한다. 이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동부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며 황무지나 다름없던 캘리포니아로 몰려든다.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골드러시의 시작이다. 당시 이들의 별명이 포티나이너스였다. 우리말로 옮기면 ‘1849년의 개척자들’ 정도가 될 것이다.

금이 발견된 때는 1848년인데 왜 1849년을 기념할까. 이들이 서부에 도착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플레이서 카운티 박물관에서 발간한 2020년 자료에 따르면, 골드러시 때 주를 이뤘던 움직임은 육로 이동이다. 많은 이들이 걸어서, 말을 타고, 마차를 이용해 캘리포니아로 왔다.

가장 일반적인 경로는 ‘캘리포니아 가도(California Trail)’로 7개 주를 거친다. 미주리 서쪽 끝에서 출발해 캔자스 네브래스카 와이오밍 아이다호 네바다를 거쳐서 캘리포니아까지 오는 이 길의 총길이는 1950마일, 약 3138㎞다. 1848년에 출발한 이들은 이윽고 해를 넘겨서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1849년의 개척자들’에게 숫자 49는 희망과 기회를 내포한다.

서부 개척정신 상징하는 리바이스

서부 개척정신(pioneer spirit)을 정체성으로 내세우는 미식축구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의 홈구장이 ‘리바이스 스타디움’이라는 사실은 자못 상징적이다. 2013년 5월, 포티나이너스는 홈구장을 샌프란시스코에서 베이 지역의 산타클라라로 옮기면서 명명권을 판매했다. 청바지 회사 리바이스가 20년간 구장 이름을 ‘리바이스 스타디움’으로 쓰는 권한을 2억2000만달러에 획득했다.

리바이스의 창업자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는 독일 바이에른 출신으로 18세 때인 1847년에 미국 뉴욕으로 건너왔다. 뉴욕에서 직물도매업에 종사하던 스트라우스는 골드러시 물결에 커다란 자극을 받는다. 그는 1853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자마자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리바이스를 창업한다. 20년이 흘러 1873년 마침내 리바이스가 청바지를 세상에 선보인다.

청바지가 탄생한 시점은 논란이 있지만 미국 특허청(USPTO)에 등록된 날짜를 기준으로 삼겠다. 스트라우스와 협력한 재단사 제이콥 데이비스는 1873년 5월 20일, ‘주머니 입구 강화(Fastening Pocket-Openings)’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받는다. 미국 특허 139121호에 등록된 그림을 찾아보면 장발의 남성이 한 손에는 곡괭이를 들고 다른 한 손은 뒷짐을 지고 서 있다. 이 남성이 입은 바지 주머니에는 여섯 개의 구리 리벳(rivet)이 박혀있다.

서류상 발명가는 제이콥 데이비스다. 그는 특허를 획득하기 2년 전인 1871년, 한 고객에게서 강도 높은 노동에도 쉽게 뜯어지지 않는 값싸고 튼튼한 옷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당시 채굴 작업 중 바지 주머니가 찢어지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고객은 주문 비용으로 3달러를 지불했는데 2024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75.84달러의 값어치가 있다. 데이비스는 말 담요를 만들 때 구리 리벳을 사용한 경험을 바지에 응용한다. 데이비스는 특허권자로 자신과 함께 회사 리바이스를 지정한다.

구리 리벳이 박힌 청바지는 이후 리바이스가 강력한 가치를 형성해 나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말 두 마리가 양쪽에서 끌어도 “찢어지면 소용없다(It’s no use they can’t be ripped)”는 초창기 캐치프레이즈에서 리바이스의 자신감을 잘 알 수 있다.

슈퍼볼 광고에 큰 족적 남긴 애플

골드러시 역사를 함께한 리바이스의 후원을 받는 ‘49년의 개척자들’은 결승전에서 패배했다. 경기 결과보다 개인적 관심을 끈 것은 슈퍼볼 광고였다. 한국의 아마존이라 불리는 전자상거래 기업의 OTT 서비스를 통해 우리말 중계를 시청했기에 실시간으로 광고를 볼 수는 없었다. 경기가 끝나고 유튜브에서 2024년 슈퍼볼 광고를 몰아서 봤다.

슈퍼볼 광고는 소문만큼 효과가 클까. 글로벌 미디어 브랜드 애드에이지(Ad Age)에 따르면 기업이 2024년 슈퍼볼에 30초짜리 광고를 하려면 700만달러가 든다. 슈퍼볼은 올해 광고로만 약 4억85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1967년 제1회 슈퍼볼 때는 편당 광고비가 3만7500달러였다. 2024년 가치로 환산해도 31만달러로 현재 비용의 4%에 불과하다. 천문학적인 금액에도 여전히 기업은 슈퍼볼 광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슈퍼볼 광고 역사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사례는 1984년 애플이다. 퍼스널컴퓨터(PC) ‘매킨토시’ 출시를 앞두고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혁명적이고 기발한 광고를 원했다. 잡스와 광고팀의 모티브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였다. 오웰은 소설에서 기술의 발달로 도달하게 될 디스토피아의 모습을 그렸고 그 시점을 1984년으로 상정했다. 소설을 쓰던 1948년의 4와 8을 뒤집은 것이다.

잡스는 이를 가져와 다시 변주했다. 애플의 매킨토시 광고에는 컴퓨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수많은 군중이 초점 없는 눈으로 ‘빅 브라더’의 연설을 지켜보는 가운데 한 젊은 여성이 달려와 화면에 커다란 쇠망치를 던진다. 마지막으로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1984년, 애플 컴퓨터가 매킨토시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왜 우리의 1984년이 오웰의 1984년과 다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광고에서 애플은 자신들을 기술로 개인의 자유를 드높이는 새로운 시대의 선봉장으로 정의했다. 광고는 미국 전역에서 즉각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슈퍼볼이 끝난 저녁, 50개가 넘는 방송국이 광고에 대해 보도할 정도였다. 뉴스에서 반복적으로 광고를 다루면서 ‘혁명적 반항아’로서 애플의 가치는 더욱 강해졌다. 애플의 1984년 슈퍼볼 광고는 지금까지도 ‘현시대 최고의 작품(Greatest of All Time)’으로 종종 선정될 정도다.

지난달 9일 뉴욕타임스의 기사 제목은 “40년 전 애플의 광고가 슈퍼볼을 영원히 바꿨다(40 Years Ago, This Ad Changed the Super Bowl Forever)”였다. 애플의 1984년 광고를 계기로 슈퍼볼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드러내는 각축전이 됐다. 투자수익(ROI)을 쉽게 입증하기 힘든 구조지만 기업이 많은 돈을 들이며 슈퍼볼 광고를 멈추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척자들의 ‘기회와 희망’부터 기술을 통한 ‘개인의 자유’까지…. 매년 세계인의 이목이 쏠리는 미국 최대 스포츠 이벤트는 보이지 않는 가치의 무한한 경쟁시장이나 다름없었다.

김욱진 코트라 경제협력실 차장 '실리콘밸리 마음산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