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가상화폐의 미래

2024-06-14 13:00:01 게재

지난 100여년 동안 정치적으로는 시민사회의 힘이, 경제적으로는 시장의 힘이 세진 결과 국가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가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오히려 점점 강해지고 있는 부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화폐를 발행·유통·관리하는 권력이다.

과거 금(환)본위제 시대에는 금의 보유량에 의해 화폐발행권이 제한되었으나 1970년대 브레튼우즈체제의 붕괴와 함께 금 태환 의무에서 벗어나면서 국가는 무제한의 화폐발행 권력을 획득했다. 이후 통화정책이 재정정책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고 금융자본주의가 재부상했다. 무소불위의 금융자본주의는 끝없는 확장을 거듭하다 마침내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초래했다.

화폐 지위 얻지 못하고 가치저장 수단 기능만 돋보여

이때 국가의 화폐권력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탈중앙화의 비전을 내걸고 등장한 것이 바로 비트코인이다. 가상화폐는 비트코인을 중심으로 지난 15년 동안 놀라운 속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처음 의도와는 달리 화폐로서 지위를 얻지는 못하고 가치저장 수단으로서 기능만 돋보이는 형국이다.

화폐로서 인정받으려면 계산의 척도, 교환 매개, 가치저장 등 3대 기능이 원활해야 하는데 가상화폐는 가격변동성이 너무 크고 시간당 거래처리량이 제한적이며 금과 같은 내재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또 기대와는 달리 현금과 같은 익명성 보장도 어려운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가상화폐 시장의 크기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커지고 일부 국가에서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하는 등 화폐주권을 위협하자, 국가는 가상화폐를 제도권 내의 금융상품으로 편입해 규제하고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유통·관리하는 가상화폐인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 도입을 검토·시험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위안화 CBDC를 국제 기축통화 경쟁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CBDC의 장점은 위조 위험 및 익명성을 제거해 거래를 투명·안전하게 한다는 점이다. 또 심각한 디플레이션 시기에 마이너스 금리정책을 시행해 투자와 소비로 자금을 유인하거나 정부지원금을 전 국민의 CBDC 계좌로 직접 이체함으로써 취약계층에 안전망을 제공하고 경기부양 효과를 도모할 수 있다.

단점으로는 자금거래의 사실뿐만 아니라 내용까지 파악할 수 있는 등 사생활의 자유를 제약한다. 또 민간은행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무력화할 수 있다. 이는 탈중앙화를 표방하고 등장한 가상화폐가 오히려 중앙화를 강화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초래했음을 의미한다.

과연 가상화폐의 ‘탈중앙 화폐’의 꿈은 영영 사라진 것일까? 그렇다고 단언하기엔 아직 이른 것 같다. 가상화폐의 결점들이 점차 개선되고 있고, 가치저장 기능이 유지되고 있는 가상화폐에 내재적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재적 가치 유무는 화폐의 필수요소가 아닐 수도 있다. 현재 통용되는 법정화폐도 내재적 가치가 없다.

사실 우리가 현실세계라고 인식하는 것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전의 천동설 세계처럼 가상세계일 수 있다. 디지털 세계는 인류가 만든 또 다른 가상세계다. 화폐의 역사로 볼 때 각각의 세계에는 그에 적합한 화폐가 있을 수 있다.

가상화폐가 가져올 미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

자본주의 사회는 본질적으로 화폐공동체다. 마르크스는 화폐를 절멸시킴으로써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비트코인을 창조한 나카모토 사토시는 자본주의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그의 창조물은 자본주의를 다양한 방향으로 이끌고 갈 잠재력이 있다.

현 자본주의 화폐공동체에 내재하는 불평등 등 결점을 개선하거나, 국가의 사회통제력을 더욱 강화하거나, 탈중앙화의 비전을 구현하거나 등 가상화폐가 가져올 미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임종식

지경학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