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의 동남아 산책

동남아의 두 '선거민주주의', 동티모르와 말레이시아

2022-06-02 12:24:26 게재
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 정치외교학과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중학교 영어시간에 부분부정의 대표적 예문으로 외웠다. 반짝인다고 전부 다 금이 아니듯 선거를 한다고 다 민주주의는 아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선거도 제대로 즉 '자유롭고 공정하게'(free and fair) 원칙을 지켜가며 치러야 하겠지만 평상시 국민의 기본권 특히 자유권적 기본권이 보장되는 정치가 이루어져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안타깝게도 동남아 국가 중 기본권이 보장되면서 자유공정한 선거를 하는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 즉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를 하는 나라는 없다. 아시아를 통틀어도 한국 타이완 일본 정도가 고작이고, 아시아에 속하고 싶어하는 호주와 뉴질랜드를 넣어도 다섯 나라가 전부다.

동남아에서는 인도네시아나 필리핀이 그런대로 자유공정선거를 하는 편이지만 국가나 다수가 국민이나 소수의 기본권을 제대로 보장·보호하지 않거나 국민 스스로 기본권 인식이 취약하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종교적 소수인 비무슬림에 대한 무슬림들과 국가의 기본권 침해가 빈번하다.

필리핀에서는 지난 5년 동안 국민 다수가 치안을 이유로 국가가 자행하는 인권유린에 동조하고 반민주적 인사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이 두 나라의 유권자들은 민주주의를 위한 선거보다 자신이 1차적으로 속한 집단의 정체성을 확인·과시하고 권력이나 교섭력을 강화하기 위해 투표한다.

합리적 독립투사들이 집권한 동티모르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서 정체성 정치가 하나의 경향이나 추세로 나타난다면, 이 두 나라 정도의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 동티모르와 말레이시아는 정체성 정치가 아예 제도로 굳어진 나라들이다.

혹 동티모르(Timor Leste)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왜 이 나라가 독립 이래 20년이 지나도록 몇몇 지도자들 이름만 거론되는지 궁금할 것이다.

샤나나 구스마오(Xanana Gusmao)는 독립 이후 첫 5년간은 대통령직을, 80일 쉰 뒤 7년반 동안은 총리직을 수행했다.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던 주제 라모스오르타(Jose Ramos-Horta)는 2006년부터 1년간 국무총리를, 2007년 이후 5년간은 대통령을 역임했고, 10년이 흐른 올해 5월에 다시 한번 대통령에 취임했다. 동티모르는 흡사 구스마오와 라모스오르타 두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처럼 들린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두세 사람의 이름이 더 등장한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타우르 마탄 루악(Taur Matan Ruak)이 대통령(2012~2017)과 총리(2018~현재)를 각각 한차례, 마리 알카티리(Mari Alkatiri)가 총리직(2002~2006, 2018~2018)을 두차례 지냈다. 프란시스쿠 구테흐스 (Francisco Guterres)가 국회의장(2002~2007)과 대통령(2017~2022)을 5년씩 했다.

동티모르는 동남아에서 인도네시아와 더불어 민주주의 점수가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2002년 독립 이래 다섯번의 총선을 아무런 차질없이 치렀고, 양당제를 중심으로 정권교체도 이루어져 공고화가 빠르게 진척되고 있다. 위기상황에서는 연립내각과 이원적 집정부제가 융통성을 발휘하는 모범적인 신생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초창기 문제가 되던 선거폭력도 사라졌다.

그런데 복수정당이 존재하고, 차별성 있는 이념을 표방하고, 선거경쟁도 흥미롭긴 하지만 정당도 후보들도 이름 빼고는 무엇이 다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하나같이 총을 들고 싸우던 게릴라 전사거나 인도네시아 감옥에서 고생하던 독립투사들이다. 어찌 보면 해방 직후 북한정권의 리더십과 흡사하다. 동티모르 지도자들은 매우 합리적이고 국제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돋보인다. 인구의 1~2%밖에 이해를 못하는 포르투갈어가 토속어 떼뚬어와 함께 2대 공용어가 된 것도 동티모르 민주주의가 강한 결속력의 엘리트적 정체성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종족적 정체성에 기반한 말레이 정당

말레이시아는 2018년 선거에서 사상 처음으로 야당연합이 승리를 거뒀다. 1959년 독립한 이후 무려 59년 만에 이루어진 정권교체였다. 여당에게 유리하게 설계된 선거제도와 공정하지 못한 선거관리 때문에 여당연합인 국민전선(BN)은 2004년 선거에서는 64%를 득표하고 총의석수의 90% 이상을 가져갔고, 2013년 선거에서는 야당연합에게 득표수에서 지고도 총의석수의 63%를 차지했다.

민주화 선거가 된 2018년 선거에선 22년간 말레이시아를 철권통치한 개발독재자 마하티르(Mahathir Mohamad)가 자신이 키운 정당을 버리고 야당지도자로 변신했다. 그는 한때 후계자였고 한때 정적이었던 안와르 이브라힘(Anwar Ibrahim)과 손잡고 과거 '친정' 정당을 무찌르고 승리를 일궈낸 기묘한 선거였다. 독재시대 지도자가 이번에는 민주화 시대의 첫 총리가 되었다. 자신의 현재가 자신의 과거와 싸워 이긴 선거였다. 그러나 두 세대 만에 교체에 성공한 민주화 정권은 2년도 넘기지 못하고 내분으로 붕괴하고 말았다.

2018년 과거의 독재정당 통합말레이전국기구(UMNO)는 2년 만에 민주화시대의 집권당으로 변신했다.

말레이시아 정당들이 오랫동안 권위주의체제를 탈피하지 못했던 것은 종족적 정체성에 기반해 고착적인 정치구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를 구성하는 종족(민족)들은 독립 직후 제각기 두세개씩 정당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다른 종족의 정당끼리 연합을 형성해 집권했다.

말레이족의 정당 UMNO가 화인(중국인)들의 정당 말레이시아중국인협회(MCA)와 인도계 정당 말레이시아인도인의회(MIC)와 연합해 야당성향 말레이정당인 전국이슬람당(PAS), 화인정당 민주행동당(DA), 인도인정당 국민진보당(PPP)을 누르고 60년 가까이 말레이시아를 통치했던 것이다.

종족적 균열로 형성된 말레이시아 정치구도를 깨고자 출현한 새로운 여당연합 희망연대(PH)는 2년을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다문화주의와 지방자치, 현대적 이슬람, 청년, 평등 등 다양한 진보적 가치를 표방하는 9개의 정당으로 구성돼 말레이시아 정치적 미래에 변화와 발전을 약속하고 있다.

선거권위주의가 자유민주주의 넘봐

안타깝게도 이러한 말레이시아의 민주화 추세는 예외에 속한다. 30여년 전 냉전시대가 종식되면서 '역사는 자유민주주의로 귀결될 것'이라는 낙관론이 컸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민족 문명 종교의 벽에 부딪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비교정치학자들은 1970년대 이후 20~30여년간 지속되었던 '제3의 민주화 물결'에 역행하는 '제3의 권위주의화 물결'이 21세기를 망치고 있다고 한탄한다. 지난 2년 간의 코로나 팬데믹도 권위주의화에 큰 몫을 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대신해 선거민주주의가 주인 행세를 하더니 10여년 전부터 '선거권위주의'가 그 자리를 넘보는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선거권위주의는 또 무언가?

선거권위주의란 선거를 아무리 그럴 듯하게 하더라도 권위주의라는 본질이 변하지 않는 체제다. 민주세력이 선거를 통해 민주화를 이루려는 뜻이 아무리 강해도 권위주의 체제를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라는 예측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앞서 필자가 선거민주주의로 명명한 말레이시아는 불과 4년 전만 해도 선거권위주의였다가 선거민주주의 체제로 이행에 성공했으니 그같은 예측은 들어맞지 않았다. 반대로 캄보디아는 불과 5년 전 동남아 최장수 독재자 훈센이 야당을 없애 버릴 때까지만 해도 국민들이 선거에 목을 메는 선거권위주의 체제였다.

다음에 다룰 싱가포르와 태국의 선거 이야기는 선거권위주의 체제의 양 극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동남아 정치의 다채로움에 흥미를 더한다.

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