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의 동남아 산책
집단적 광기의 크메르루주 리더십
지난 9월 22일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는 16년간 진행된 캄보디아특별재판소(ECCC)의 마지막 재판이 열렸다. 통상 캄보디아 특별법정, 또는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으로 불린 이 재판은 20세기 후반 최악의 반인도적 전쟁범죄를 저지른 크메르루주 집단의 만행을 낱낱이 밝히고, 책임자들에게 상응하는 죄값을 물을 목적으로 캄보디아와 국제연합(UN)이 공동으로 설립한 '혼합'재판소가 주관했다.
그러나 이 특별재판소는 무려 16년이란 긴 시간과 국제사회로부터 기부 받은 3억3700만달러(한화 약 4500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을 쓰고도, 고작 5명을 재판에 회부해 3명에게 무기징역 판결을 내리는 데 그쳤다. 그중 2명은 재판 중에, 다른 2명은 선고 후 복역 중에 죽었는데, 사망 당시 나이가 각각 87세, 83세, 77세, 93세였다. 2020년 현재 캄보디아인들의 평균수명은 70세에 불과하다. 9월 22일 마지막 재판에서 형이 확정된 키우삼판은 91세로 장수를 누리고 있다.
그 이전, 캄보디아 대학살극의 총책임자 폴포트는 73세에 자연사했으며, 홀로 최후까지 저항하다 잡힌 '인간백정' 타목은 7년 동안 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채 감옥에만 있다가 81세에 사망했다. 타목과 함께 크메르루주 군부의 핵심인물이었던 케 파욱은 1998년 훈센에게 투항해 정부군의 장군이 되었다가 간질환으로 죽었다.
폴포트에게 계속 의심 받다 결국 배신자로 찍혀 일가족 13명과 함께 몰살당한 국방장관 손센만이 제명에 못 살았지만, 70세의 나이였다. 크메르루주가 쫓겨난 지 43년, 캄보디아는 학살과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았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크메르루주 범죄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주라고 불린 친중국계 공산게릴라들의 프놈펜 함락으로 정점에 이르렀던 캄보디아 내전은, 이 살인마집단이 친베트남계 헹삼린-훈센 반군세력과 베트남군에 의해 쫓겨나는 1979년 1월까지 3년 9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무려 170만명에 달하는 무고한 캄보디아인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는 당시 캄보디아 총인구의 1/4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기아와 질병, 강제노동 중의 과로로 숨진 이가 절반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고문 처형 집단학살에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프랑스어로 '붉은 크메르'라는 뜻의 크메르루주(Khmers rouges)는 캄보디아 전역을 자신들의 이름처럼 '붉은' 피로 물들인 '킬링필드'로 만들었다.
3년 9개월이란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이 킬링필드에서 저질러진 끔찍한 참극은 캄보디아에 대한 국제사회의 무지와 무관심에서 비롯되었다.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패배, 크메르루주 집단에 대한 무지, 국경폐쇄, 지도부의 극단적인 외국인 혐오주의는 당시 캄보디아에서 벌어지고 있던 비극적 상황의 실상이 국제사회로 확산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1984년 영국이 제작한 영화 '킬링필드'를 통해 그 실상이 알려졌을 때만 해도 이런 천인공노할 대학살극이 20세기 후반에 버젓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믿는 이가 별로 없었다.
처형된 사람들의 '죄목'이 자의적이고 모호해 따져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프놈펜 점령 후 당의 지령은 이전 정권이나 외국인과 협력한 자를 비롯해 지식인과 전문직 종사자, 소수민족, 성직자, 동성애자 등을 숙청대상자로 명시했다. 심지어 안경을 끼거나 손이 고운 사람들을 지식인으로 몰아 처형했다. 집권 말기에는 당원들이나 군인들까지 미국이나 베트남의 스파이로 몰아 처형했다.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 뚜올슬렝 감옥에 잡혀 온 사람 중 살아나간 사람이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전임 감시원들이 후임 감시원들에 의해 반혁명 분자로 몰려, 고발 고문 처형되는 작태까지 벌어졌다.
처형하는 방식도 잔인해 총알을 아낀다고 몽둥이로 쳐죽이거나 비닐봉지로 질식사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감옥에서 일하던 감시원의 80%가 21세 미만의 청소년들이었다.
'농촌 유토피아'라는 망상이 낳은 비극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처형되고 학살된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수의 캄보디아인들은 크메르루주 지도부의 망상에 가까운 이데올로기에 희생되었다. 우두머리 폴 포트를 중심으로 한 지도부는 '자급자족적인 농업 중심의 유토피아'로 요약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한다는 급진적이고 허황된 사고에 젖어 있었다.
자본주의를 모든 사회적 개인적 악의 원천으로 보았으며, 도시를 그 온상으로 여겼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오염된 도시인들을 재교육과 노동을 통해 '신인민'으로 거듭나게 하고, 화폐 시장 도시를 철폐하고, 전국토를 농촌공동체로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프놈펜을 점령한 지 단 사흘 만에 200만에 달하는 시민을 도시 밖으로 몰아냈다. 이들은 몇날 며칠을 걸어 프놈펜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지역으로 배치됐다. 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도시인들을 황무지를 개간하는 강제노역에 투입하고 집단농장을 급조해 거주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수십만명이 기아 질병 충격 구타 감금으로 죽어갔다.
이들은 인종주의자이면서 비뚤어진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외국인들과 국내 소수민족들이 '순진무구한' 크메르인들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생각해, 국내의 '적들'과 함께 이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2만명 정도로 추산되던 베트남인들을 '깨끗이 청소'했으며, 수천년을 함께 살아 온 소수민족 참족 25만명 중 9만명을 학살했다. 폴포트 집권기 동안 도시에 거주하며 상업활동에 종사하던 중국인들 43만명 중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혁명에 크게 장애가 되지 않은 타이인, 리오인, 다른 고산족들도 크메르루주의 인종청소를 피해 가지 못했다.
야만의 시대 이끈 지도부 다수가 지식인
동남아 고전시대 500년 동안 동남아 최고의 문명을 건설했던 캄보디아를 야만의 시대로 이끈 주역들은 폴포트를 정점으로 한 크메르루주 지도부였다.
이들의 배경과 행적을 추적하고 분석했던 초기의 저널리스트들과 학자들은 한결같이 이들의 협소한 동질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작해야 열명 남짓의 지도부는 거의 모두가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유학을 하거나 대학을 다닌 지식인들이었으며, 귀국 또는 졸업 후에는 중고등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몇몇은 서로 친인척관계에 있었다.
폴포트를 비롯해 뉴온치아 이엥사리 키우삼판 키우티릿 손센 등 여섯명의 최고 지도부가 다 프랑스 유학파였다.
키우삼판은 파리대학에서 경제학박사를 취득하고 귀국해 대학교수가 된 최고의 지식인이었으며, 이엥사리의 아내 키우티릿은 법관의 딸로 태어나 캄보디아 최초로 외국에서 영문학사를 취득한 재원이었다. 그의 언니는 폴포트의 첫 아내였다. 심지어 폴포트의 사촌누이는 모니봉왕의 왕비 중 한사람이었다.
크메르루주 지도부에 속한 구성원들의 가정환경, 사회적 신분, 교육 배경, 직업과 경력을 보면 이들이 어떻게 그토록 혁명적인 이념에 심취해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국가권력을 쟁취하고, 급진적인 방법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했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가 공산주의자가 되고, 서구에서 유학을 한 자들이 외국인 극혐 민족주주의자가 되었으며, 대학 교육을 받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폭력으로 국가권력을 빼앗아 지극히 시대착오적이고 비현실적인 '농촌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한 집단적 광기의 크메르루주 리더십은 정치학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분석학이나 사회심리학의 연구대상이 되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