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의 동남아 산책
동남아 민주화에 역행하는 '정치왕조'
"둘째 왕자의 결혼식은 수도에서 500㎞ 떨어진 왕의 탄생지와 인근 왕국에서 사흘에 걸쳐 진행됐다. 첫날엔 전통혼례 방식에 따라 가족만 참여한 가운데 왕자비를 새로 맞이하는 의식을 치렀다. 둘째날은 전통의상을 화려하게 차려 입은 왕자·왕자비가 탄 마차와 그 뒤를 따라 왕·왕비가 탄 마차가 시내 거리를 행진하자 길을 가득 메운 백성들이 연호했다. 셋째날은 왕의 탄생지에서 50㎞ 떨어진 강성한 이웃 왕국에서 종교의식에 따라 공식적인 결혼식이 거행됐다. 여기에는 왕족 귀족 대신 성직자들 150명이 참석했다. 결혼식의 대미를 장식한 만찬은 다시 본국의 왕궁으로 자리를 옮겨 초대받은 6000명의 국내외 귀빈들이 참석하는 성대한 행사로 치러졌다."
이것은 전통시대 동남아시아의 한 왕국에서 벌어졌던 결혼식 광경이 아니다. 놀랍게도 불과 두달 전 인도네시아에서 실제로 있었던 결혼식을 필자가 살짝 각색한 것이다. '왕'을 조코 위도도(조코위) 대통령으로 '왕자'를 아들로, '수도'를 자카르타로, '왕의 탄생지'를 솔로(수라카르타)로 '이웃 왕국'을 족자카르타로 바꾸면, 지난해 12월 9~11일 진행된 조코위 대통령의 2남 카에상 팡아럽(Kaesang Pangarep)의 결혼식 장면과 거의 일치한다.
생존한 전직 대통령 두사람이 모두 참석했고, 결혼식 준비위원장직과 신랑 신부측 우인대표 및 증인은 모두 내각의 장관들이 맡았다.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이 타고 온 전용비행기가 무려 40대였다. 안전요원으로 경찰 2188명을 차출한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 동원된 군인과 공무원을 합하면 1만2000여명에 달했다.
인도네시아 조코위 대통령의 정치왕가
조코위 대통령의 둘째 아들 결혼식이 있기 정확하게 2년 전인 2020년 12월 9일, 인도네시아는 9개주 주지사와 37개시 시장을 뽑는 지방선거를 치렀다. 여기서 조코위 장남과 사위가 각각 아버지의 정치적 디딤돌이었던 솔로와 인도네시아 5대 도시 메단의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장남 기브란의 나이는 33세, 사위 보비는 29세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현직 시장을 비롯해 당원 당직자 당지도부 모두, 정치적 경험이 전무한 두 젊은이들의 출마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정면 대결이나 노골적 반대를 회피하는 인도네시아, 특히 자와 사람들의 특성이 결국 '조코위 왕가' 탄생에 일조했다.
인도네시아는 필리핀과 달리, 최고 지도자급의 정치 명망가가 '정치왕가'의 창건자로 등극하는 현상을 보인다. 인도네시아 역대 대통령들 중 후손이 정치를 하지 않은 경우는 민주화 이행기 대통령으로 술라웨시 출신이던 하비비가 유일하다. 수카르노(장녀-대통령), 수하르토(3남-정당대표), 와히드(장녀-정당대표), 수카르노뿌뜨리(장녀-국회의장), 유도요노(장남-자카르타시장 후보), 조코위로 이어지는 자와 출신 대통령은 한결같이 정치하는 자식을 남겼다. 특히 현 대통령 조코위는 8년 재임 기간을 통해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고, 아들딸 3명과 배우자들을 모두 성대한 전통결혼식을 통해 공개무대에 등장시켰으며, 이들을 재임 중 정치에 입문시킴으로서 퇴임 후 정치 왕가 창건에 나섰던 선배 대통령들에 한발 앞섰다. 두 며느리는 모두 미인대회 출신이다. 현재 조코위 대통령의 지지율은 무려 76.2%에 달한다.
이들은 시장직에 오른 지 겨우 2년이 지난 지금 벌써부터 2024년 지방선거에서 주지사로 출마하는 방안을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장남 기브란은 이번에 결혼한 동생 카에상에게 시장직을 물려 줄 뜻을 비쳤다.
'정치왕조'란 영어 원어 political dynasty를 직역한 용어인데, 복수의 정치인이 대를 이었다고 해도 최고지도자가 1명에 그친 가문을 모두 왕조로 명명하는 것은 지나친 개념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고지도자의 지위는 아니더라도 상하원 국회의원 등 정치고위직을 수단의 정당성이나 방법의 합법성을 가리지 않고 가족이나 친인척에게 승계하려는 정치를 '왕조정치'로 부르는 데엔 이견이 없다.
왕조정치는 현대 동남아정치에서 드물지 않은 현상이지만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유독 강하게 나타나 신생 민주주의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인도네시아의 왕조정치는 비단 최고위급인 대통령이나 총리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민주화 이후 거의 모든 지방선거에서 '지방 왕가'가 활개를 치고 있다.
한 연구자에 따르면 2015~2018년 각 주별로 실시된 주지사 및 지방의회 선거에서 202명의 정치인 가문 출신 후보가 출마해 117명이 당선됐다. 2020년 지방선거에서는 군수 시장 주지사 261개직 중 53개를 이들 후보가 차지했다는 조사가 있다. 조코위의 장남과 사위도 거기에 속한다. 또한 갈수록 많은 지역에서 명문가 후보끼리 같은 자리를 두고 맞붙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반떤주의 한 도시에서는 부시장 자리를 놓고 현 부통령의 딸과 국방부 장관의 조카가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인도네시아 정치의 필리핀화"라고 비꼬기도 한다.
필리핀 마르코스 가문 부활의 역설
동남아에서 왕조정치의 원조는 단연 필리핀이다. 필리핀 의회 의원 70%가 지방 '정치가문' 출신이다. 이러한 정치가문 수는 대략 200개로 추산된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필리핀 중앙정치 무대에서의 정치적 경합은 정치명문가 간 대결이 주를 이루고, 같은 가문출신끼리 경합하는 선거구도 적지 않다.
또 가난한 가구공장의 아들이었던 인도네시아 조코위 대통령처럼 성공적인 정치인은 정치가문을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 정치가문들 또한 흥망성쇠를 거듭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필리핀 정치가문들은 일반적으로 지방을 중심으로 농장 토지 기업 피후견인(지지자) 등 풍부한 물적 인적 자원을 갖고 있다. 반면 명성에 의해 창출된 인도네시아 '왕가'는 재생산에 필요한 기반이 취약하다.
안타깝게도 21세기 들어 오히려 왕조정치가 증가하는 추세다. 필리핀 민주화 직후인 1988년 선거에서 정치가문 출신 지사가 당선된 것은 41%에 불과했지만, 2019년에는 그 비중이 80%로 무려 곱절이다. 시장직 또한 40%에서 53%로 늘어났다. 지사직에 비해 느리긴 해도 증가세인 것은 마찬가지다.
마르코스 독재를 무너뜨린 민주주의 체제가 36년 만에 마르코스 가문을 정치가문으로 성장시키면서 두번째 대통령을 배출시킨 것은 엄청난 역사적 역설이자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도미노처럼 번지는 정치왕조 바람
다른 동남아 국가들로 고개를 돌려보면 민주주의 확산이나 공산주의 도미노현상처럼, 왕조정치도 모방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를 낳게 하는 현상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캄보디아 독재자 훈센은 차기 총선에서 아들 훈마넷을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켜 2028년까지 총리후보로 키우겠다고 공언하는 뻔뻔스러움을 보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싱가포르 현대사의 80% 이상을 통치한 싱가포르 왕조정치는 일단은 끝나는 듯해 다행이지만, 선민주의 사고로 무장한 싱가포르 엘리트들이 어떤 비민주적 정치를 만들어 낼지는 두고볼 일이다.
체제반대자들도 정치왕조 유혹에 취약하긴 마찬가지다. 2006년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태국 총리 탁신 친나왓은 여동생을 후계자로 지목해 총리로 만들었다. 하지만 여동생 역시 쿠데타로 실각했다. 그러자 2021년 30대 중반 막내딸 패통탐을 세번째 총리 후보로 내세웠고 현재 차기 총선을 준비중이다. 20년 넘게 탄압받는 정치인의 상징이었던 말레이시아 안와 이브라힘 총리의 딸 누룰 이자의 향후 행보도 주목된다.
동남아의 왕조정치는 철칙(iron law)으로 불리는 과두제만큼 보편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현상이나 뚜렷한 추세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