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 칼럼

결자해지 못하면 타자해지

2023-10-26 11:37:15 게재
박종권 언론인,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사자성어는 어렵다. 한글세대에겐 더욱 그렇다. 설령 한자를 이해해도 연원과 맥락을 모르면 오해하기 십상이다. 예컨대 천고마비(天高馬肥)가 그렇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이다. 지금은 가을의 대표적인 상투어가 됐지만 여기엔 두려움과 경계심이 깔려 있다. 중국의 북방 변경에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이민족들이 몰려온다. 약탈경제에 익숙한 기마민족이다. 그들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 만리장성이다. 천고우비(天高牛肥)면 농경민족에게 수확과 풍요의 상징이겠지만 소가 아니라 말이 살찐다고 하지 않나. 천고마비는 약탈자의 말발굽에 대한 걱정의 산물이다.

정치인은 종종 사자성어로 자신의 심경이나 처지를 드러낸다. 직설화법보다 짧지만 여운이 강렬하기 때문일까. 권력다툼 쳇바퀴 정치판에 대표적인 게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연원은 와신상담(臥薪嘗膽) 주인공 월왕 구천의 군사였던 범려다.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하자 범려는 짐짓 구천을 떠나면서 동료인 문종에게 편지를 보낸다. "높이 나는 새가 잡히면 활은 창고에 처박히고, 날랜 토끼가 잡히면 사냥개는 삶기는 신세가 된다." 자신의 공을 믿었던 문종은 떠나지 않았고, 결국 자결하게 된다.

이후 초한지의 주인공 유방이 항우를 꺾고 천하를 통일하면서 토사구팽이 재연된다. 승리의 일등공신 한신이 진짜로 가마솥에 삶기는 거다. 한신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바로 토사구팽이다. 우리나라에도 있다. 노태우 정권 때 국회의장을 지낸 김재순은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하지만 문민정부의 재산공개 파동에 연루된다. 김재순은 토사구팽이란 말을 던지며 불명예스럽게 정계를 은퇴한다.

매듭 묶은 이가 스스로 푼 경우 드물어

개고기 식문화가 사라진 요즘 MZ세대에게 구팽(狗烹)을 설명하기 난감하다. 88올림픽을 계기로 사철탕이 보신탕을 대신했다가 요즘 염소탕으로 전환하는 추세니까. 그럼에도 양두구육(羊頭狗肉)은 이해하기 쉽겠다. 맛있고 비싼 호주산 양갈비를 걸어 놓고 싸구려 개고기를 판다는 뜻으로 말이다. 원래 양두구육은 겉과 속이 다르거나 언행의 불일치를 비유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겉은 훌륭하나 속은 비루하다는 뜻이 더 강해졌다. 국민의힘 이준석 전 대표가 대표직에서 몰려나고 자격정지까지 당하면서 더 유명해졌다.

이 사자성어로 설화를 입은 그가 얼마 전 결자해지(結者解之)를 선보였다. 서울강서구청장 보궐선거는 윤 대통령에 대한 심판이므로 스스로 결단하라고 눈물로 호소한 거다. 지난 1년5개월의 잘못을 반성하고 야당대표를 만나고 당무개입을 중단하고 이념투쟁을 멈추고 국정 기조를 바꾸라는 거다. 내년 4월 총선 승리를 위해 자신이 묶은 매듭을 자신이 풀라는 거다.

말이 그렇지 매듭을 묶기는 쉬워도 풀기는 어렵다.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그렇다. 영국이 묶은 매듭을 미국이 물려받았지만 여전히 못 풀고 쩔쩔매지 않나. 실타래가 그렇듯 서두를수록 더 꼬인다. 짜증을 견디고 시간과 뒹굴어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매듭도 여러가지다. 얼핏 복잡하게 보이는 매듭도 사실은 툭 털면 풀리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풀기 어려운 매듭이 있다. 바로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다. 알렉산더대왕도 매듭을 풀려 했으나 너무나 복잡했다. 짜증이 나 칼로 내리쳐 잘라내면서 "아시아 땅의 왕이 된다"는 신탁도 이루어졌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매듭을 묶은 이가 스스로 푼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방벌(放伐)이라는 혁명의 칼에 매듭이 잘렸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선거를 통해 매듭을 정리했다고 할까. 물론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위왕은 '날지도 울지도 않는 새'란 비유에 "일명경인(一鳴驚人)"을 외치며 결자해지로 태평성대를 이루지만.

여야 비대위원장 출신 김종인씨는 최근 방송에서 "선거는 여당이 하기 나름"이라고 주장했다. 여당이 잘하면 이기고 잘못하면 진다는 거다. 야당이 이기는 건 여당이 잘못했을 때 뿐이라고 했다. 결국 윤 대통령이 국민의 뜻을 읽어 국정기조를 바꾸느냐, 오불관언(吾不關焉) 마이웨이를 외치느냐 여부에 총선 결과가 달려있다는 거다.

글쎄다. 여당이 잘하더라도 야당이 더 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주면 국민은 변화를 추구하지 않을까. 선거 민주주의에서 묶은 자가 풀지 않으면 남이 풀 수 있다. 결자해지 말고 타자해지(他者解之) 말이다. 국제문제도 그렇다.

정쟁은 정치인 몫, 피해는 국민 몫

지금 국내외가 온통 매듭 투성이다. 전쟁은 군인이 벌이나 피해자는 민간인이다. 정쟁은 정치인이 벌이나 피해는 국민 몫이다. 모두가 불신의 산물이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다. 끈기와 참을성으로 신뢰를 쌓는 게 매듭을 푸는 비결이다.

내일 희망이 있다면 오늘 고통은 견딜 수 있다. 독존은 암흑이고 절망이다. 공존이 빛이며 희망이다. 그렇다고 적대적 공생까지 희망인 것은 아니다. 개살구로 포장된 공멸의 길이다.

박종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