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의 동남아 산책

동남아의 정치와 경제 - 상관관계와 상호작용

2024-02-13 13:00:01 게재

정치경제학은 말그대로 정치와 경제의 관계와 상호작용을 다룬다. 정치경제를 이렇게 정의해 놓고 보면, 연구범위가 막연, 모호하고 변수들이 추상적이고 무한한 것 같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정치경제학은 과학적 방법과 엄격한 분석을 중시하는 현대 경제학으로부터 버림받다시피 해, ‘경제학적 가정과 논리로 정치행위를 분석’하는 신고전파 정치경제학이라는 주변적인 하위분야로만 살아 남았다. 반면 경제학을 제외한 인접 사회과학 분과학문들, 특히 정치학과 국제관계, 사회학, 인류학, 지리학 등에서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접근법 내지 분야로 더 각광을 받고 있다.

동남아에서 정치와 경제는 양방향 작용

동남아에서 정치와 경제 관계는 그냥 지나쳐 버리기엔 현실적으로도 학술적으로도 너무 중요하다. 지금 동남아정치에서 주된 쟁점을 구성하는 금권선거, 정치적 부패, 정경유착과 화인재벌, 과두제, 정치왕가, 정체성의 정치, 외국인투자, 국영기업과 관료기업 등이 모두 정치경제학적 연구과제이다. 동남아의 역사를 보면, 과거 구미 식민주의자들은 물론이고 근현대에 일본이나 한국이 동남아로 진출한 동기가 이 지역의 풍부한 자원과 경제적 요소들을 확보하고자 한 것인만큼, 외부세력의 동남아 지배, 점령, 외교적 접근 등 군사적 정치적 행위조차도 경제와 관련 지어 분석해봐야 한다.

현대 동남아에서 경제가 정치와 가지는 관련성은 양방향적이다. 먼저 정치를 독립변인(요인), 경제를 종속변인(결과)로 삼는 방향에서는 ‘경제적 가치 실현에 정치적 힘이 어느 정도 작용하느냐’ 라는 문제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동남아의 맥락에서 경제적 가치라고 한다면 ‘경제발전과 산업화’ ‘경제 정책과 이념’ ‘자본가와 기업가 형성’ 등을 들 수 있고 이들이 동남아 정치경제의 주요 연구과제로 자리잡았다.

동남아 정치경제에서 단연 최대 관심을 끈 주제는 동남아 각국과 지역전반의 경제발전에 작용한 정치적 요인일 것이다. 즉 어떠한 정치적 상황과 정책적 선택이 동남아의 경제발전을 촉진하거나 저해했는가 하는 문제다. 동남아 국가들은 독립국가로서 탄생한 이후 평탄하지 못한 정치사적 과정을 걸어오면서 세가지 정책적 기조와 전환을 공통적으로 경험했다. 독립 직후 외국자본과 화인(중국계)자본을 배척하거나 차별한 ‘경제민족주의’, 1980년대 이후 국가의 개입을 줄이고 국내 시장을 개방한 ‘경제자유화’, 그리고 1997~1998년 이후 가속화된 ‘지역통합’이 그것이다.

1980년대 이전 민족주의적 차별정책과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통해 경험한 경제적 폐해는 이후 동남아국가들이 독점 규제 개입보다 시장 경쟁 자유를 중시하는 자본주의 원칙을 예외없이 받아들이는 교훈으로 작용했다. 비록 사회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의 유산과 잔재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꿈틀대기도 하지만 경쟁적인 시장경제, 개방적인 경제체제, 지역적 경제통합을 향한 방향성만은 변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동남아와 아세안의 패권적 경제 이데올로기로서 자유시장경제의 위상은 굳건하다.

이념적 정책적인 요인과 대비되는 ‘구조적인’ 정치적 요인도 정치경제의 연구과제로 자리잡았다. 정치적 안정이나 통합을 동남아의 고도 성장과 지속을 이끄는 정치적 요인으로 보는 연구들이다. 2006년 쿠데타 이후 상당기간 지속된 태국정치의 혼란과 분열은 최근 미얀마의 내전 상황과 더불어 안정적인 동남아정치라는 보편적 현상의 예외를 구성하지만, 지난 40여년동안 동남아의 경제성장이 정치적 안정으로 뒷받침되어 왔다는 두 변인 간의 상관관계를 확증해주는 사례를 구성한다.

여기서 정치적 안정을 권위주의로 읽어 권위주의 정치가 경제성장을 가져오는 것으로 인과관계를 강변하는 정치인들과 관변 학자들도 있으나, 체제와 경제발전 간의 관계는 비교정치학자들이 해묵은 논쟁으로서 동남아의 사례들도 궁극적인 해답을 주지는 못한다. 동남아의 경험들이 명확하게 보여주는 바는 체제와 무관하게 안정과 통합은 매우 중요한 성장요인이지만, 권위주의체제하의 정치적 불안정은 최악의 부정적 성장요인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권위주의체제는 언젠가는 불안정을 낳을 수밖에 없으므로, 결국 권위주의적 안정에 대해서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발전 불일치 사례

경제에 영향을 미친 정치적 요인으로 세번째로 관심을 끈 주제는 미시적인 것이다. 즉 동남아의 경제발전을 견인한 주체가 국가가 아닌 민간부문, 정부관료가 아닌 기업인 경영인이라고 한다면 자본축적과 자본가형성, 기업인들의 기업가정신, 경영인들의 경영 마인드와 기술은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동남아 정치경제의 역동성은 이 의문을 캐기 위한 다양한 탐색에서 빛을 발한다. 애초에는 동남아에는 민족자본이 없어 외국자본이나 대리인들이 경제성장을 이끌어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단하거나, 동남아경제는 화교(중국인)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탓에 경제발전은 동남아인들에게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통속적인 관점들이 담론을 지배했다. 하지만 근자에는 동남아경제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동남아인들이며, 중국인과 화교로 배척당해 온 중국계 기업인들도 현지 국적과 정체성을 가진 엄연한 동남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지금은 연구의 초점이 과거 식민통치 사회주의 경제민족주의 관료제 등에 의해 억압받던 토착 및 이슬람 상인, 부자, 화인들이 어떻게 현대 동남아의 자본가 기업인 전문경영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에 맞춰져 있다. 정치경제학자들은 동남아의 현대적 자본가와 기업인의 기원과 성장을 역사 문화 전통 정치 사회체계 국제정세 등 다양한 측면에서 찾고자 했다. 비록 이들의 강조점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국가의 물리적이거나 상징적인 권력, 정치인과의 관계, 정책적 지원 등 제도적 권위와 폭력이 제공하는 특혜가 주효했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필자는 동남아의 정치와 경제 간의 관계가 양방향적이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의 역방향, 즉 경제가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바에 대한 연구 또한 정치경제학적 연구대상이다. 경제를 요인, 정치를 결과로 인과성을 분석하는 연구 또한 실로 다각적이고 다차원적이다. 따라서 필자도 동남아의 정치체제, 정치변동, 민주화 등을 논하면서 여러 경제변인들을 언급했다. 흔히들 그리고 시각에 있어 좌와 우를 막론한 연구들이 경제가 발전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 그 나라의 정치는 민주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그런데 동남아 사례는 경제 발전과 성장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반드시 가져다주지 않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탈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국경제 경쟁상대는 아세안일 수도

최근 20여년간 동남아는 인도와 함께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중이다. 미래에 대해서도 낙관론이 지배적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경제민족주의에 대한 나쁜 역사적 기억, 시장경제에 대한 강한 신념, 경제자유화와 아세안을 통한 지역통합, ‘협의와 합의’의 정치문화가 보장한 정치적 안정 등 많은 긍정적 요소들이 아세안과 동남아가 외국인 투자자와 국제금융기관들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게다가 지난 10년 사이 악화된 미중갈등과 시진핑 일인체제제화는 동남아의 경제적 매력과 국제경쟁력을 더욱 강화해주고 있다.

그러는 사이 우리 대한민국은 이념적 정치적 분열과 세대간 젠더간 갈등이 정책적 혼란과 대결로 치달아, 시장의 불안정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더욱 커지고 있다. 코로나 사태 종식 이후 한국경제의 경쟁상대는 더 이상 미국 일본 유럽이 아니라 개방적 시장경제에 대한 합의와 지역통합을 바탕으로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는 아세안이라는 지역전문가들의 경고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서강대 명예교수 정치외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