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세낭비 공무원 배상책임 첫 인정

2024-02-15 13:00:04 게재

용인경전철 주민들, 용인시 상대 행정소송 파기환송심 승소

법원 “용인시는 전임시장 등에게 214억원 배상 청구해야”

실제 배상할지 미지수 … 당사자 “중앙정부 심의 승인 거쳐”

혈세 낭비 정책을 결정한 지자체 등 공직자들에게 손해배상책임이 있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서울고등법원 행정10부(성수제 부장판사)는 14일 ‘용인 경전철 손해배상 청구를 위한 주민 소송단’ 소속 주민 8명이 용인시장을 상대로 “경전철 사업 책임자들에게 총 1조원대 손해배상을 요구하라”며 낸 주민 소송 파기환송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2013년 10월 주민 소송이 제기된 이후 10여년 만에 나온 판단이다.

앞서 1, 2심은 “용인 경전철 사업은 주민 소송 대상이 아니다”고 했지만, 대법원은 2020년 7월 주민 소송이 가능하다고 보고 파기 환송했다. 사건을 다시 심리한 환송심재판부는 이날 “현 용인시장은 당시 경전철 사업을 추진한 이정문 전 시장(2002~2006년 재임)과 한국교통연구원을 비롯한 연구원들을 상대로 214억6800만원을 지급하도록 청구하라”고 밝혔다. 2013년부터 2022년까지 사업시행자에게 이미 지급한 4293억원을 용인시의 손해액으로 확정하고, 책임비율을 5%로 판단한데 따른다.

지난해 12월 18일 경기도 용인시 용인경전철 기흥~삼가역 구간에서 신호시스템 장애 발생으로 열차 운행이 중단돼 있다. 이 여파로 다른 구간의 열차 역시 운행이 불가능한 상태여서 승객들이 하차해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불편을 겪었다. 사진 연합뉴스
이에 현 용인시장은 이번 판결이 재상고 후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되면 ‘불법공동행위자’들을 상대로 60일안에 손해배상금 지급을 청구해야 한다. 기한까지 지급되지 않으면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정책실패 재정손실은 중대과실= 재판부는 이 전 시장이 경전철 사업 시행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실시협약을 2004년 맺어 중대한 과실을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이 전 시장이 시와 시행자 사이에 적절한 위험부담이 이뤄지지 않도록 한 것은 ‘시장으로서의 선관주의의무를 현저히 해태’한 것이란 이유이다.

특히 이 전 시장은 기획예산처 장관이 ‘30년간 90% 운영수입 보장은 축소할 필요가 있다’는 실시협약안 심의결과를 통보했는데도 이를 실시협약에 반영하지 않았다. 게다가 거액의 재정지출이 수반되는데도, 시 의회의 사전 의결 절차 등 법령상 필요한 절차조차 준수하지 않았다.

또 재판부는 교통연구원과 소속 연구원들이 과도한 수요 예측으로 시에 손해를 입힌 과실도 인정했다. 수요예측에 관한 합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은 채로 과거 자료를 그대로 사용해 예상수요를 산출했다. 교통연구원은 2001년 시의 사업 타당성 분석 및 수요 예측을 의뢰받고 1일 교통 수요 13만9000명(2008년 기준)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2013년 4월 경전철 운행이 개시된 이후 그해 1일 평균 이용객은 9000명에 불과했다.

이같은 잘못된 수요예측으로 추진된 경전철 사업이 또 있다. 2012년 7월 개통한 의정부 경전철은 실제 승객수가 40%를 넘지 못했다. 3600억원 누적적자를 감당하지 못한 사업자는 4년 10개월 만에 파산했다. 2011년 개통한 부산김해경전철도 수요예측 잘못으로 김해시가 매년 500억원가량의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주민소송은 지자체 전체 주민 모두에 효력 = 2010년 6월 완공된 용인경전철은 시가 시행사인 캐나다 봄바디어사와 최소수입보장비율(MRG) 등을 놓고 다툼을 벌인 끝에 2013년 4월 개통됐다. 시는 국제중재재판까지 간 끝에 패소해 이자를 포함해 8500억원을 물어줬다. 2016년까지 운영비와 인건비 295억원도 지급했다. 그러나 경전철 하루 이용객은 교통연구원 예측에 한참 미치지 못해 용인시는 재정난에 허덕였다.

이에 시민들은 2013년 10월 당시 시장과 정책보좌관 박 모씨를 상대로 1조232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주민소송을 냈다. 주민소송은 지방자치단체의 불법 재무회계 행위의 손해를 회복하기 위해 주민들이 제기하는 소송이다. 주민소송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지자체 전체 주민에 대해서도 모두 효력이 있다.

행정안전부가 발간한 ‘2023 행정안전통계연보’에 따르면 2022년 12월 31일 기준 주민소송은 총 50건이 제기됐다. 현재 용인경전철 사건을 포함해 7건의 소송이 진행 중이다. 종결된 43건 중 41건은 주민 패소나 취하, 각하 등으로 종결됐다. 서울 서초구에서 제기된 사랑의교회 공공도로 점용 허가 무효확인 소송, 경기 안성에서 제기된 하수시설 민간투자사업 협약내용 정보공개 거부 처분 취소 청구 소송만이 주민들이 승소한 사례였다.

◆‘주민들 나서라’ 선언한 법원 = 이번 용인경전철 소송은 2005년 이 제도 도입 이후 지자체가 시행한 민간투자사업 관련 사항을 주민소송 대상으로 삼은 최초 사례다.

재판부는 이날 판결과 관련해 “주민소송의 인용에 소극적이었던 종전의 판결례와는 달리 손해배상책임을 정면으로 인정했다”면서 “지자체장이 중대과실로 손해를 입힌 경우에는, 임기가 끝난 이후에도 주민들이 나서서 손해배상청구를 지자체에 할 수 있음을 선언한 것”이라고 밝혔다.

법원 판결에 따라 용인시는 책임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전망이다. 소송을 낸 주민측 현근택 변호사는 “소송제기 10년 만에 용인시의 정책 결정을 잘못한 당시 시장과 연구기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면서도 “이 청구 소송 역시 3심까지 갈 것으로 보여 실제로 돈을 받으려면 지난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