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용의 러시아 톺아보기

러시아-인도 관계와 유라시아 지정학

2024-02-22 13:00:00 게재

러시아-인도 관계의 향방에 따라 러시아의 미래상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중국이 러시아의 대유라시아주의를 완성해가는 동서축의 핵심 국가라면, 인도는 러시아-중국-인도 삼각관계를 중핵으로 하는 대유라시아 공간에서 남북축을 완성시키는 러시아의 또 다른 전략적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러-인 관계는 세계질서의 변화에 따라 여러차례 부침의 단계를 지나왔다. 구소련 해체 후 러시아가 대서양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러-인 관계의 전략적 위상이 모호했던 시기도 있었다. 2000년대 푸틴 체제가 등장하고 유라시아주의가 부상하면서 러-인 관계는 ‘질적으로 새롭고 높은 수준’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들어섰다. 하지만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집권 이후 인도가 대중국 견제 및 세력균형 차원에서 미국-인도 전략적 동반자관계 수립으로 선회하고, 러시아가 이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파키스탄과 군사협력을 가동함으로써 상호불신이 증폭되고 양국관계에 일정한 균열이 생기는 침체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최근 러-인 경제협력의 급진전은 언뜻 ‘기이한 현상’처럼 보인다. 서구의 논자들은 전형적인 ‘후견-피후견 관계’가 해체된 상황에서 러-인 관계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전망해왔다. 그 주된 근거로는 양자관계가 주로 정치적 군사안보적 측면에 치우치고,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물적토대라 할 수 있는 통상 및 투자 관계가 지체되거나 퇴조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다른 그림이다. 2014년 양국 정상은 2025년까지 교역 규모를 300억달러로 증대한다고 밝혔는데, 2022년에 493억달러에 도달했고, 러시아는 처음으로 인도의 제3위 교역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인도의 1, 2위 교역 상대국인 미국과 중국을 추격하는 양상이다.

교역급증은 대러제재와 잦은 교류 결과

하지만 러-인 관계가 다시 과거 수준으로 회복할 것으로 전망한다면 조금은 성급한 판단이다. 사실 경이적인 교역 급증은 ‘뜻하지 않게’ 인도의 대러 수입이 급증한 데 기인한다. 인도는 미국 및 동맹국들과 건설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국제관계 원칙 아래 러시아와 협력하는 실리적 균형정책을 취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인도가 수출길이 막힌 러시아 제품을 저가에 대량으로 수입한 것은 제재와 역제재가 대립하는 지정학적 충돌에서 받은 일종의 ‘보너스’로 해석된다. 인도는 대러 제재에 불참함으로써 유가상승과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돌아오는 ‘부메랑 효과’를 피할 수 있었고, ‘덤’으로 국부 증대 및 대러 협상력 강화의 기회를 얻었다.

그렇다고 경제협력 성과를 모두 외부의 우연적인 환경 덕분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된다. 오랜 세월 지속된 고위급 정상의 잦은 접촉과 대화는 필수였다. 그 외에도 최상위 대화채널인 ‘러-인 정부 간 경제통상과학기술문화협력위원회’를 필두로 이해관계의 차이를 조정하는 다양한 대화채널이 중단없이 가동되었기에 통상협력이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접근법 및 상대국의 경제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전제되지 않았다면 ‘지정학적 변동성’을 ‘지경학적 기회’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실속 없이 구호만 요란하고 과시성 홍보에다가 유명무실한 대화채널수만 늘려왔던 한국의 북방정책과는 결이 달랐다.

지정학적 환경 등 장애요소 산재

현재 러-인 경제관계 발전에는 복잡한 지정학적 환경을 비롯해 루블-루피 상호무역결제와 교역 불균형에 따른 구조적 문제 등 여러 장애요소들이 존재한다. 우선 급격한 지정학적 환경 변화에서 비롯된 긴장과 상호불신을 극복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인도는 러시아가 동방으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고,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과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에 지지를 표명하며 중국과의 유대관계를 밀착시키는 행보를 경계한다. 인도는 중-러 안보협력 강화가 본질적으로 인도-태평양 지역을 지향하는 인도의 전략적 이익을 훼손한다고 인식한다.

반면 러시아는 ‘쿼드’(Quad)에 참여한 인도가 미국과의 연계를 강화하면서 대외전략의 정향을 서방으로 선회한다면, 결국 유라시아는 적대적 진영으로 양분되고 러-인 공동의 이해관계도 자동소멸될 것을 우려한다. 러시아에게 이 시나리오는 자신이 주창하는 대유라시아주의의 남북축이 무너지는 재앙으로 받아들여진다.

상호보완성 측면에서 경제협력의 잠재력은 명확해 보인다. 인도는 현재 세계 3위의 대규모 에너지 수입국이고, 향후 7~8%의 고속성장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이 절실하다. 현재는 그 절박한 요구를 에너지 부국인 러시아가 충족시켜주고 있다. 인도는 2010년대부터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확대했다. 2020년 인도의 주요 광물성 연료 에너지 수입 대상국 순위에서 러시아는 13위였는데, 2022년에는 3위로 껑충 올라섰다. 수입 비중도 1.9%에서 11.1%로 급증했다. 원유만 분리 계산하면 2022년 인도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은 전년 대비 19배나 증가했다.

하지만 적잖은 문제들이 있다. 교역이 협소한 품목들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고, 교역 불균형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2022~23년 회계연도 인도의 대러 주요 수입품은 에너지 비료 농산물 귀금속 무기였다. 이 가운데 연료 에너지와 비료는 총교역의 91%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한편 인도는 의약품 유기화학제품 기계류 전자장비 농업원자재 및 식품을 러시아에 수출하지만 규모가 너무 작다. 2022~23년 회계연도 기준으로 총 31억달러 수출에 그쳤다. 대략 14배에 달하는 교역 불균형이다.

한편 루블화-루피화 상호무역결제 시행과 교역 불균형에서 비롯된 루피화 계정의 과다 누적 사태도 문제다. 러-인 상호무역결제는 1992년 중지되었다가 2022년 6월 인도중앙은행이 스위프트(SWIFT, 국제은행간 통신협회)에서 배제된 러시아측 은행들과의 결제를 위해 재개되었다. 2023년 6월까지 러시아 은행들이 총 14개의 인도 은행들에 상호결제계좌(SVRA) 개설을 신청해서 승인된 것은 총 34건이었다.

루피화 누적 문제 해소 방안으로는 인도의 자동차 부품이나 일반 의약품 생산에 합작 투자하거나, 인도측에서 전통적인 대러 수출산업 외에 현대 산업 장비, 광업 및 정유산업, 식품산업, 인쇄 장비, 항공 부품, 의료 장비, 전자 및 섬유 등에서 수출 증대를 꾀하자는 방안이 제기되고 있다.

물류 애로 해결도 긴급한 과제다. 이와 관련해 북극항로, 남북국제운송로(INSTC) 개척이 중대 과제로 제기된다. 러시아는 INSTC가 수에즈운하 통과 항로에 비해 운송기간을 단축하고 비용도 절감할 수 있기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반면 최근 인도는 INSTC 외에도 북극항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등 지역 분쟁 요소가 발생해 수에즈운하의 취약성이 드러난 상황에서 북극항로와의 연계가 훨씬 실리적이라는 계산이 작동한다. 물론 러시아 극동에서 중국을 견제할 전략적 필요도 고려되었을 것이고, 러시아 극동 시베리아의 에너지 자원 탐사 및 개발 투자를 본격화하고 인도까지 수송을 원활하게 하려면 북극항로 개척이 절실하다는 상황 판단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러-인 전략적 동반자관계 지속될 듯

향후 세계질서의 변화에 대응한 러시아와 인도의 기회주의적 국익 추구와 그에 따른 양자관계의 부분적인 재조정은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러시아와 인도는 다극적 세계 질서 형성을 위한 ‘전략적’ 동반자이고, 제재로 발생한 세계경제의 회색지대를 헤쳐나가며 생존과 부상을 도모하는 유라시아 남북 회랑의 연결축이다. 러시아의 대유라시아주의가 폐기되지 않는 한, 또 인도의 실리균형정책이 포기되지 않는 한 이들의 ‘특별 특권 전략적 동반자관계’는 지속될 전망이다.

인천대 교수 동북아국제통상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