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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인의 안전은 고용주의 책임

2024-03-22 13:00:03 게재

사업주는 고용에 수반되는 임금 등의 제반 비용 이상의 재정적 이익을 얻기 위해 근로자를 고용한다. 고용주는 근로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았더라도 불법 또는 비윤리적 행위를 요구하지 않을 것과 고용인의 인권에 해당하는 생명과 건강을 보호해야 한다.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은 근로자를 고용한 사업주의 의무를 정한 법이다. 산안법 제정 시에 건설업 등 동일 장소에서 도급사업이 이뤄진 몇몇 업종의 도급인(원청)에게 수급인(하청)의 근로자 안전확보 의무를 분담하도록 했다. 당시의 고용환경과 경영여건을 감안한 일종의 변칙이었다.

1981년 1883달러였던 1인당 국내 총생산은 2022년 3만2418달러로 17배 이상 성장했다. 5.6배에 달하던 일본과의 격차가 거의 대등한 수준에 이르렀다. 중대재해 발생률 역시 1981년 대비 1/10 이하로 감소했다. 그 사이에 우리나라는 개인은 물론, 기업 경영과 현장의 생산여건까지 천양지차로 변했고 그 과정에 생산성 향상 명분으로 도급사업의 비중도 크게 증가했다.

그런데 수급인 근로자의 안전확보를 도급인에게 부담시킨 변칙은 그 실효성을 자세히 헤아려 보지 않은 채 더 확대돼 원칙처럼 자리잡고 있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중대재해법) 제정 이후 하도급 공사를 주로 하는 전문 건설업체들 중에 안전보건 컨설팅을 자발적으로 받는 등 고용인의 안전확보 의지와 여력이 크게 증가했다. 이제는 국가 차원의 중대재해 감소를 위해서 근로자의 안전확보에 관한 도급인과 수급인의 역할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같은 조치의 공동 이행으로 인한 불확실성

사고는 예측 불가능하고 직접적인 위험은 작업과정에서 조성된다. 설비와 작업방법 이해를 통한 정확한 작업이 사고예방의 핵심이다. 따라서 작업 중 안전확보는 근로자에게 구체적인 작업지시를 하는 자의 역할이다. 작업발판과 같은 구체적·직접적인 조치를 작업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도급인에게 공동 이행을 맡기는 것은 이행의 확실성을 높이기보다 상호의존과 엇박자로 인한 불확실성을 키우게 된다. 야구경기에서 타구를 잡으려고 수비수 2명이 공만 보고 달려가는 장면을 떠오르는 상황이다.

특히 건설공사처럼 공정에 따라 계속 변하는 작업은 작업 흐름을 정확히 꿰고 있는 자의 기민하고 정확한 작업지시가 관건이다. 같은 조치에 대한 도급·수급인의 공동 책임으로 안전조치의 적정성과 확실성을 높일 수는 없다.

도·수급 관계에서 도급인의 역할은 따로 있다. 도급하는 일의 설계 시방 기간 비용 등의 작업 조건과 환경에 수급인의 안전조치를 저해하는 요소가 없도록 해야 하고 수급인의 안전확보를 확인하고 지원하는 간접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법규와 정책이 시대상황에 부합하려면 안전조치의 책임 주체를 고용주로 하고 도급인의 간접적인 역할을 명확히 설정하는 방향으로 발전돼야 한다.

2021년 산안법 전면개정 시 수급인 근로자 안전교육에 관해 교육은 수급인 측에서 하고 도급인은 교육장소 제공 등의 간접적인 지원을 하도록 정했다. 도급인과 수급인의 역할을 이런 방향으로 나눠가야 한다. 하지만 같은 법규에서 구체적인 조치를 도급인과 수급인이 공동 이행하도록 한 변칙적인 설정은 사고예방에 기여하기보다 불확실성을 키우는 시대착오적 오류이지 싶다. 고용인의 안전보건은 고용주의 의무라는 것이 사회의 규범이 되도록 해야 한다.

도급과 발주의 혼선

도급과 발주에 따라 산안법에 정한 의무가 크게 달라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되고 있다. 발주는 도급의 범주에 속하는 한가지 형식이다. 고용노동부의 해설을 보면 이 점을 간과한 것 같다. 건설공사에 국한시킬 사안도 아니다.

도급 목적물의 설계와 시방, 기간이 도급 계약 전에 확정돼 있거나 수급인의 결정사항이고, 목적물의 제작과 설치 또는 시공과정에 도급인이 개입하지 않는 것을 계약조건으로 한 도급을 발주로 하면 된다.

비록 발주여도 이행 과정에 공기, 품질 확인과 계약 전에 미처 고려하지 못했거나 시장여건 변화를 반영하기 위한 중간 개입은 허용하되 계약조건에 수급인의 안전조치를 저해하는 요소가 없도록 해야 한다. 고용주를 고용인의 안전확보의 직접적인 책임 주체로 하는 원칙이 정립되면 이 혼선도 대부분 정리될 일이다.

‘만일’ 즉 ‘만에 하나’는 일어나지 않을 일의 전제에 쓰이는 말이다. 현재 중대재해의 발생 확률은 ‘2만일’이다. 그 낮은 발생확률의 사건을 현장 작업과정에서 막아내야 하고 그 핵심은 작업에 가장 근접해 있는 고용주의 역할이다. 그 책임을 지지 않으려면 근로자를 고용하지 않아야 한다.

고재철

법무법인 화우 고문, 전 안전보건공단 안전보건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