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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성(ESG) 공시 의무화, 시기상조인가 필수인가

2024-05-24 13:00:01 게재

지난 4월 30일 한국회계기준원 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는 국내 지속가능성 공시기준(ESG 공시 기준)의 공개초안을 발표했다. 이는 지속가능성 공시 의무화가 가시화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상공회의소 등 기업을 대표하는 많은 기관들은 지속가능성 공시 의무화가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며, 이는 기업의 부담을 가중시켜 경쟁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유럽연합(EU) 일본과 같은 자본시장 선진국은 민간이 주도해 1~2년 내로 지속가능성 공시 의무화를 확정했다. 브라질 필리핀과 같은 자본시장이 덜 발달된 나라조차 2~3년 내로 이를 의무화하기로 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여전히 지속가능성 공시 의무화를 미루고 있는 몇 안되는 주요 국가 중 하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시장의 역사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구가 아시아와 이슬람보다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불과 200년 전의 일이다. 18세기까지 경제 선진국은 중국 인도 이슬람 등 아시아 문화권 국가였다. 그러나 18세기부터 경제 패권은 서양으로 급격히 이동했다. 금융 이론가 월리암 번스타인(William J. Bernstein)은 서양이 경제적 우위를 가지게 된 배경으로 (사유)재산권, 과학적 합리주의, 교통 및 통신의 발달, 그리고 ‘거대자본의 형성’을 꼽았다.

투자자보다 기업총수에 민감한 문화

우리나라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거대자본의 형성’이다. 과거 우리나라는 국가 주도로 외환을 유치해 1970년대 고도성장을 이루었고, 2000년 초 IMF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정부는 경제성장에 필요한 거대자본을 형성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수행해왔다.

이와 달리 자본시장 선진국에서는 거대자본 형성을 민간이 주도한다. 자본시장의 진리 중 하나는 높은 수익률이 있는 곳에 돈이 몰린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수익률이 높고 재무적으로 건전한 기업에 투자하고자 한다. 이로 인해 자발적으로 모인 돈이 거대자본이 되고 이는 경제성장의 중요한 동력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나라 주식시장의 코리아디스카운트 현상은 투자자에게 ‘미래 지속가능한 높은 수익률’이라는 기대심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해서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투자자의 수익률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다. 오히려 경영권을 가진 총수일가의 사적이익 추구에 더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기업 내 주요 의사결정자의 인사권은 투자자가 아니라 경영권을 가진 일부 대주주나 총수일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투자자를 위한 활동에는 관심이 없고, 총수일가나 정부정책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혹자는 국내 부동산시장이 거대해서 주식시장으로 몰릴 자금이 부족하여 ‘코리아디스카운트’가 생겼다고 말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가상자산(코인) 시장에서 코리아 프리미엄이 붙을 정도로 높은 가격이 형성된 것을 보면 주식시장이 투자자에게 덜 매력적인 시장이라는 것이 더 맞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국내 기업들은 왜 지속가능성(ESG) 공시 의무화를 외면하는가? 이는 KSSB가 발표한 ‘지속가능성(ESG) 공시 의무화’가 투자자를 위한 규정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기업들이 지속가능성 공시에 주목한 계기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Rock)이 기업들에게 기후 관련 정보를 요구하면서부터다. 그러나 국내 기업의 경영진은 투자자보다는 기업 총수와 정부의 요구에 더 민감하다. 따라서 지속가능성 공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공시의무 연기하면 코리아디스카운트 심화

그렇다면 지속가능성(ESG) 공시 의무화는 필요한 것인가? 코로나19 이후 투자자들은 외부 충격에 대한 기업의 대응 능력을 알기 위해 다양한 지속가능성 정보를 요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기업의 전략과 비전을 투자의사 결정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따라서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조달받기 위해서는 지속가능성 공시 의무화가 필수적이다.

투자를 받을 유인이 없는 기업에는 ESG 공시 의무화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투자를 받은 상장기업에 대해 ESG 공시 의무화를 지속적으로 연기한다면 이는 궁극적으로 코리아디스카운트 현상을 심화시키고 장기적으로 신규 기업의 투자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이다. 정부는 장기적인 국가의 부(富)를 위해 조속히 지속가능성 공시 의무화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정준희 대구대 회계학과 교수